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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yes — Issue 16. 필환경 생활

멈춰버린 도시로부터

From a City at a Standstill

  • 2020.04.06
  • writer. 권영민

모든 것이 멈춘 도시에 갇혀버린 지금에서야 나의 이기심이 결국 모두에게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깨닫는다.


또 멸종이라니?

“지금은 늑대가 너무 많이 죽어서 늑대를 볼 수 있는 곳이 거의 없어요. 몇몇 사람은 늑대가 멸종될까 봐 걱정했어요”. 얼마 전 아이와 함께 읽던 책의 한 부분이다. 이 대목을 읽어주자 아이는 “또 멸종이야?”라며 고개를 들었다. “또 멸종이라니?” 내가 되묻자 아이는 “말리 코끼리도 원래 1000마리나 됐는데 지금은 400마리도 안 남았대, 지구가 더워져서. 어제 읽은 책에는 바다거북이도 바다에 기름이 퍼져서 많이 죽었대. 왜 전부 다 멸종으로 끝나는 거야?” 그러고 보니 그랬다. 아이와 함께 읽은 동식물 관련 책은 언제나 멸종으로 끝난다. 동물은 언제나 위기에 처해 있고, 자연은 더러워졌고, 지구는 병이 들었다.

그런데 나는 아이에게 매일같이 책을 읽어주면서도 그런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말리 코끼리가 400마리밖에 남지 않았고, 늑대도, 바다거북도, 돌고래도 개체 수가 줄어들고 있다는 내용을 아이에게 읽어주면서 나는 그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동물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은 어릴 적부터 오랫동안 들어온 말이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호주에서 큰불이 났다는 뉴스를 보고, 열한 살 된 아이가 울기 시작했다. “아빠, 저 불 안 꺼지면 어떡해?”라고 흐느끼는 아이를 안아주며 말했다. “걱정 마! 불은 언젠가는 꼭 꺼지게 되어 있어.” 맞은편에서 내 말을 듣고 있던 파트너인 H는 나를 쏘아보며 말했다. “그걸 위로라고 하냐? 캥거루와 코알라가 멸종 위기라고 우는 거잖아.”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된 나는 다시 아이를 보듬어 안고 말했다. “아, 괜찮아. 캥거루, 코알라가 완전히 사라지진 않을 테니까.” H는 또다시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런 말만 할 거면 방에 들어가서 잠이나 자!” 솔직히 말해 아이가 그런 뉴스에 우는 것에 공감이 가지 않았다. 우리와는 너무 먼 일 아닌가. 다른 무서운 뉴스도 많지 않은가.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남의 나라, 그것도 남의 나라 사람들이 아니라 남의 나라 동물들이 위기라는 것이 지금 이렇게 울 일인가, 그런 생각도 든 게 사실이다.


빠는 돌고래가 불쌍하지 않아?

나는 사람들이 ‘환경’을 위한답시고 하는 모든 것이 호들갑 떠는 것처럼 보였다. “지구가 아파요”라는 추상적 말도, “환경을 생각하는 자동차”라는 말도 자동차를 팔기 위한 마케팅 수단처럼 보였다. 내연기관 시대에서 전기모터 시대로의 진입은 자동차 회사에는 피처폰 시대에서 스마트폰 시대로 전환하는 것과 같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시장이 열리는 혁신의 기회가 될 테니 전기차를 사서 타는 건 지구에 좋은 일이라기보다는 자동차 회사에나 좋은 일처럼 보였다. 게다가 전기차를 타서 환경보호에 일조한다는 것도 자기 위안에 불과한 것 같았다. 도대체 나 하나, 아니 이 넓은 지구에서 고작 몇 만 명 정도가 전기차를 탄다고 해서 환경문제가 해결될 리 없지 않은가. 석유와 달리 전기는 친환경 연료라고들 하는데, 전기는 대부분 화석연료에서 나온다. 미세먼지는 자동차 매연보다 사실은 타이어와 브레이크 패드의 마모가 더 큰 원인이라고 하는데, 전기차도 타이어나 브레이크 없이 달릴 수 없는 법이다. 기업의 마케팅 전략과 소비자의 자기만족이 짝짜꿍이 되어 환경보호를 또 다른 산업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호주의 산불 소식에 위로 같지 않은 위로를 아이에게 건넨 것도 어쩌면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H에게 말했다. 나는 열을 내며, 자동차 기업의 위선과 소비자가 소비하면서 환경을 보호한다는 믿음이 얼마나 허구적이고 자기기만적인지, 미국의 셰일가스 혁명이 환경에 미칠 영향에 대해, 또 전 지구적 자본주의가 지구온난화의 이유라고 열변을 토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아이가 물었다. “아빠, 아빠는 돌고래가 불쌍하지 않아? 돌고래 배 속에 빨대가 가득하대”, “불쌍하지. 돌고래가 불쌍하긴 해도...”라며 말을 이어나가려던 그때 H가 끼어들었다. “그건 그냥 공감 능력이 부족한 거야. 논리를 끌어와서 자기가 공감이 부족한 걸 가리려 하지 마”라고 했다. 억울했다. 속으로 외치긴 했지만 들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공감 능력이 부족한 게 아니라, 현실을 말한 거라고!”

그렇다. 나는 현실을 말한 것이다. 우리가 호주의 산불, 아니 호주에 살고 있는 캥거루와 코알라를 아무리 걱정한다고 해도 도대체 무엇이 달라질 수 있단 말인가. 직업 철학자로서도 할 말이 있었다. 그렇다면 당신들은 호주에 살고 있는 뱀과 쥐와 거미와 오소리와 토끼에 대해서는 왜 걱정하지 않는가? 우리는 사람을 닮았거나 사람과 가까운 관계에 있는 동물에 대해서 더 공감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당신이 뱀과 쥐·거미·오소리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고 있다면, 내가 호주에 살고 있는 캥거루나 코알라보다 한국에 있는 내 가족과 사람을 더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답이 없는 이야기가 오가다 아이는 침대로 갔다. 불 꺼진 거실의 소파에 우두커니 앉아 나는 아이의 말을 떠올려보았다. “아빠는 돌고래가 불쌍하지 않아?” 나는 정말 공감 능력이 부족한 것일까?


나, 어엿한 사회인

내 경험에 비춰 말해보자면, 사회생활이란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민폐를 끼치는 활동의 연속이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에게 어쩔 수 없이 손해를 끼치게 된다. 영업 사원은 전화 받기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야 하고, 사장은 직원에게 더 좋은 아이디어를 내도록 힘들게 요구해야 하고, 시장 상인은 물건값을 가능한 한 더 받아야 하고, 나는 물건값을 할 수 있는 한 더 깎아야 한다. 내가 휴가를 쓰면 나를 대신해 동료는 더 많은 일을 해야 하고, 누군가의 진급 소식은 다른 누군가에게는 우울한 소식이 된다. 이렇게 사회생활은 끊임없이 민폐를 끼치면서 이뤄지는 것이라 생활이 거듭될수록 내가 민폐를 끼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나는 미안해하거나 송구한 마음을 덜 느끼고 무뎌진다. 그러니까 내가 민폐를 끼치는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공감하려 하면 할수록 나는 직원들에게 제대로 일도 못 시키는 사장, 사람들에게 전화도 제대로 못 돌리는 영업 사원, 자기 물건에 값도 제대로 못 받는 장사꾼, 필요할 때 휴가도 쓸 줄 모르는 숙맥, 즉 무능한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생활을 계속해나간다는 것은 공감의 범위를 점점 더 좁혀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내 아이, 내 파트너, 내 가족에 대한 공감만 남겨두고, 내 가족을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공감보다는 민폐 끼치는 것을 당연한 일이라고 사회생활이 내게 가르쳐줬다. 그것이 ‘현실’이라고, 그것 말고 다른 방법이 있냐고,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냐고, 모두를 만족시키겠다는 생각이야말로 이기적 발상이라고.... 십수년 간의 사회생활 결과로 나도 어느덧 그런 어엿한 사회인이자 동시에 공감 능력이 부족한 그런 어른이 되고 만 것이다.

어엿한 사회인이자 공감 능력이 부족한 어른이 된 탓에 돌고래도, 캥거루도, 코알라도, 불타고 있는 호주에도 신경이 쓰이지만 애써 마음을 주지 않으려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공감이 되지 않았기보다 공감했지만 그 문제에 더는 마음을 쓰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생각해도 해결되지 않는 일에 마음 쓸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마음을 아무리 써도 불은 꺼지지 않고, 누군가는 플라스틱을 바다에 계속 버리고, 동물들은 늑대부터 말리 코끼리, 바다거북, 시베리아호랑이 너나없이 사라지고 있다. 지금 나는 코알라와 캥거루의 죽음보다는 돌고래의 죽음을 싫어하는 것 이상으로 여름에 더운 것을 더 싫어하는 이율배반적인 내 아이를 위해 우리 집이 여름에 너무 덥거나, 겨울에 너무 춥지 않도록 하는 일에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한다. 그런 이유로 우리의 안락함을 유지하기 위해 동물과 바다와 땅에 민폐를 끼치는 것에 대해서는 마음을 덜 써야 할 것 같았다.


집에 갇히고 나서야 깨달은 것

어제는 미세먼지가 심한 날이라 창문을 한 번도 열지 못했다. 아이는 날씨난에 미세먼지라 적고, 심심하고 답답하고 짜증났고 집에서 낮잠을 많이 잤다고 썼다. 아이 일기장에서 맑음, 흐림, 비, 눈, 안개가 적힌 날은 며칠 되지 않는다. 대신 ‘미세먼지’로 적힌 날은 절반이 넘는다. 내 가족을 위해 민폐를 끼치고, 내 아이의 안락을 위해 자동차를 사고, 여름이면 쉴 새 없이 에어컨을 돌리는 것, 이것이 우한의 어느 시장에서 팔지 말아야 하는 물건을 팔고, 살아남기 위해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지역을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과 얼마나 다른 일일까?

결국 내 가족에 대한 좁디좁은 공감으로 땅과 바다, 동물 등에 끼친 민폐는 지금 나와 우리 가족에게로, 우리 모두에게로 돌아오고 말았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지금 나는 이 글을 대구에서 쓰고 있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덮친 바로 그 대구다. 여기에 꼼짝없이 갇혀 있는 처지가 되고서야 좁은 공감은 결국 이기심이었음을 깨닫는다. 마스크를 쓰고, 장갑을 꼈다. 자동차를 타고, 마트에 가서 플라스틱 용기에 든 물건을 사고, 보일러를 돌리고, 아이와 샤워를 한다. 아무렇지 않은 듯 계속되는 일상이지만 예전처럼 마음이 편하지 않다. 그건 코로나19 때문이기도 하고, 내 이기심 때문이기도 하다. 돌고래와 캥거루와 코알라를 걱정하는 것이 그저 되지도 않는 일을 두고 호들갑을 떠는 일이 아니라는 것도 좁은 집에 가족 모두가 유폐되고 나서야 배우게 된 것이다.


유난과 호들갑의 가능성

“유난 좀 그만 떨어.”

지난해 여름이었다. 배달 음식과 함께 온 플라스틱 쓰레기를 분리수거함에 버리는 것을 본 H는 내게 쏘아붙였다. “용기를 씻어서 버려야지 그냥 버리면 어떡해!” 구박을 하기에 참지 못하고 유난 떨지 말라고 이야기했다가 작은 다툼이 시작됐다. 남들도 다 그냥 버리니까 그렇게 해도 괜찮다고 해도, 씻어서 버리지 않으면 분리수거하는 분이 힘들다는 말에 그분들 걱정하는 마음으로 나를 좀 걱정해달라고도 했다. H의 유난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지난 연말에는 자신의 차를 경차로 바꿔버렸다. 연비, 환경보다 안전이 중요하단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뚱뚱한 탓에 더위를 견디지 못하는 내가 가장 선호하는 에어컨 설정 온도는 19°C지만, 파트너는 틈만 나면 25°C로 바꿔 짜증이 자꾸 솟구친다. 우리 하나 이래 봐야 소용없다고, 아무리 말해도 통하지 않는다.

H는 그런 내게 오래된 추억 하나를 꺼냈다. 오랜 투병 생활을 해야 한 아버지를 간호하며 남들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미안해하면서 가져다준 헌혈증 한 장 한 장이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헌혈증 한 장을 가져다주려고 지방에서 열차를 타고 올라온 친구의 모습을 떠올리며, 헌혈증 한 장이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상상’하고, 그 상상을 믿으면 믿기지 않는 일도 일어난다는 것을 아느냐고도 물었다. H는 호주 산불로 피해를 입은 가족의 인터뷰를 보며 몸을 떨면서 울었다. 우리의 유난과 호들갑도 신음하는 지구를 살리는 상상이 정말 될 수 있을까? 헌혈증 한 장의 노력이 될 수 있을까?

“네 차도 경차로 바꿔”라는 H의 말에 “대통령도 경차로 바꾸면 나도 그럴게”라고 시답잖은 농담으로 응수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민폐를 끼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라고 해서 민폐 끼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며 ‘적극적으로 민폐를 끼치며 사는 삶’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민폐를 끼치며 살지만, 조금이라도 덜 끼치려 전전긍긍하는 삶’에 인간의 희망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차까지 바꾸진 못해도, 환경 단체에 참여하진 못하더라도 플라스틱 빨대를 쓰지 않거나 플라스틱 용기를 씻어서 버리는 것 같은 작은 일에도 호들갑을 떠는 삶, 그런 삶이 미래의 구원이 되는 것이다.



권영민


서울대학교에서 서양철학을 전공하고, 철학을 공부하는 공동체인 ‘철학본색’을 운영하며 강의를 하고 있다. 숙원하던 음악 공부를 위해 유학길에 오른 아내 대신 아들 선재를 키워낸 값진 경험을 육아 일기로 기록했다. 그 기록을 엮어 《철학자 아빠의 인문 육아》라는 책으로 출간했다. 6년 터울로 태어난 둘째 선율이 덕분에 다시 육아 전쟁을 치르고 있지만, 아이 둘이 함께하는 완전한 삶을 만들어보겠다고 매일 다짐한다.
  • 2020.04.06
  • writer. 권영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