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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yes — Issue 17. 사이의 세대

10대가 정치하는 나라

A Country of Teenage Politicians

  • 2020.09.21
  • Writer. 김누리

초등학생이 시위하는 나라

독일에서 가장 부러운 것을 한 가지만 선택하라면, 나는 주저 없이 ‘시위하는 초등학생’을 꼽겠다. 유학 시절 “아마존을 살려내라”, “아웅산 수치를 석방하라”고 외쳐대는 초등학생들을 TV에서 보고 깜짝 놀랐다. 몇 해 전 베를린에서 그런 초등학생 데모대와 직접 마주친 적이 있다. 베를린의 가장 중심가인 훔볼트 대학교와 브란덴부르크 문 사이 운터덴린덴 거리에서 차선 2개를 차지하고 200~300명쯤 되는 초등학생이 대열을 이루어 행진하고 있었다. 모두 열 살 전후의 어린 학생들이었다. “불법적인 인간은 없다”고 적힌 현수막이 나부꼈다. 한창 아프리카 난민의 불법체류 문제로 떠들썩하던 시절이었다. 낮은 구름이 잔뜩 낀 10월의 오후, 자못 심각한 표정의 어린이들이 세상을 향해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당당하게 밝히고 있었다.

얼마 전 이 땅에서 ‘안녕’ 대자보가 한창 물결치던 어느 날 독일 함부르크 중앙역 광장은 3500여 명의 학생으로 넘쳐났다. 난민 추방에 반대하는 함부르크 초·중·고등학교 학생들이었다. “불법적인 인간은 없다”, “모두에게 체류권을”, “국경 반대, 국가 반대, 추방 반대”라고 쓴 푯말과 현수막이 끝없이 이어졌다. 열두 살 펠틴은 작문 수업이 끝나자 친구들과 함께 달려왔다. 이레네 할머니도 초등학생 손녀의 손을 잡고 왔다. 손녀가 공적인 삶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시민이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교사들은 이곳에서 ‘사회 과목 현장 수업’을 진행했고, 독일 교원 노조는 “학생 파업은 정치교육의 실습”이라며 학생들을 응원했다. 함부르크 교육청도 “학생들이 사회적으로 타당한 주제에 비판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환영한다”고 밝혔다.

이렇듯 10대 학생들의 시위는 독일에서 특별한 일이 아니다. 특히 초등학생의 정치의식은 그야말로 놀라운 수준이다. 어린 시위자들의 구호는 생태·인권·정치 이슈를 넘나든다. 이들의 잦은 ‘가투(가두 투쟁)’ 때문에 교통 정체가 빈번해지자 “택시 운전사들의 공적은 초딩들”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생겼다.

프랑스도 마찬가지다. 서열화한 대학 체제의 상징이던 소르본 대학교를 해체해 학생들을 입시 지옥에서 해방시킨 것은 바로 고등학생 자신들이었다. 프랑스의 대학이 오늘날 민주적이고 평준화한 모습을 갖춘 것은 1968년에 벌어진 대대적인 학생운동 덕분이다.

10대들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은 안나 뤼어만 Anna Lührmann이다. 열 살 때 생태계 파괴의 실상을 보고 정치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안나는 열두 살에 그린피스 회원이 되었고, 열네 살에 녹색당에 입당했다. 열일곱 살엔 헤센주 녹색당 청년 대변인이 되었고, 열여덟 살에 마침내 연방의회에 진출했다. 독일 최초의 고등학생 국회의원이 탄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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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만 하지 말고 참여하자. 우리 스스로 세상을 바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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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2005년 안나 뤼어만을 초청해 ‘청년 정치의 가능성’이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한 적이 있다. 그중 안나의 정치 슬로건이 인상적이었다. ‘세대 대표성’이라는 개념도 신선했다. “연금 문제처럼 미래 세대의 부담을 결정하는 자리에 정작 그 당사자가 없는 상황은 부조리하다”며 분개했다.

100만 난민의 기적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시리아 난민 사태가 유럽 대륙을 뒤흔든 2015년 무렵, 100만 명의 난민을 수용하겠다고 밝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프랑스, 영국에서 수만 명의 난민 수용 문제로 ‘극우당의 결선 투표 진출’, ‘브렉시트 결정’ 등 정치세계가 들끓던 시점에 독일에서 100만 명의 난민을 받겠다고 나선 것이다. 실제로 독일은 그해에 117만 명에 달하는 난민을 받아들였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어느 나라 국민이 100만 명의 난민을 받겠다는 정부를 용인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 놀라운 결정이 초래한 정치적 후폭풍은 예상 밖으로 잔잔했다. 국민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우려 속에서도 메르켈의 결정을 받아들인 것이다. 사실 메르켈의 결단보다 더 놀라운 것은 이를 받아들인 독일 국민의 높은 정치의식이다.

이 독일의 기적은 어린 시절부터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정치교육과 이를 통해 형성된 높은 정치의식이 없었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베를린과 함부르크의 어린 시위대는 ‘100만 명의 난민 기적’을 낳은 사회 분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실로 독일의 교육은 나치 시대에 인류사적 죄악을 저지른 독일인을 인도적인 세계시민으로 변화시키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이 성공의 바탕엔 정치교육이 있다.

독일의 경우 열여섯 살(고1)부터 지방의회 선거와 교육감 선거, 열여덟 살부터 연방의회 선거에서 투표권을 갖는다. 선거철이면 학교 강당에서 정치 유세가 열리며, 최소 2시간의 선거 유세 참가를 의무로 규정해놓은 학교도 많다. 학생의 정치 활동도 폭넓게 보장한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의 학교법에 따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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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은 정당이나 노동조합에서 개최하는 세미나 등에 참여하기 위해 최대 일주일간의 결석을 신청할 권리”가 있으며, “누구나 열네 살부터는 정당에 소속된 청년회에 가입할 수 있고, 열여섯 살부터는 정식으로 정당 당원으로 활동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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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청소년은 이러한 정치적 권리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권리를 요구하고 있다. 열여섯 살부터 연방의회 투표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요구를 꾸준히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열여섯 살 펠릭스 핑크바이너 Felix Finkbeiner 등 열 살에서 열일곱 살에 이르는 15명의 청소년이 2014년 7월 헌법재판소에 18세 선거 연령 조항 철폐를 요구하는 헌법 소원을 제출했다. 핑크바이너는 인터뷰에서 “많은 청소년이 정치적 견해를 가지고 있고, 투표하기를 원한다. 그들을 위해 우리가 선거권을 요구하는 것이다. 선거 연령을 더 낮춰야 한다. 16세나 14세가 적당할 것이다. 더 어린 청소년이나 아동도 공식적으로 선거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삶을 진지하게 대하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 아니냐”는 물음에 “기후변화, 세대 정의, 교육 등의 문제는 젊은이도 관심이 많다. 청소년이 선거 결과에 직접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면 정당이 청소년의 요구를 더 많이 고려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것은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또한 “투표율이 점점 낮아지는 시대에 이를 해결할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야 한다. 지방 차원에서는 16세 선거가 이미 잘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이 연방 차원에서는 잘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참으로 야무지고 논리적인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의 헌법 소원은 카를스루에에 있는 헌법재판소에 제출되었다. 소장에서 이들은 “청소년을 선거에서 배제함으로써 독일은 ‘연금 생활자 공화국’이 되어가고 있다”며 기성 정치권을 비판했다. 정부의 연금 개혁 결과, 미래 세대가 ‘극단적으로 높은’ 연금 부담금을 떠맡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최근에 결정한 ‘최소임금제’도 18세 이하에게는 적용하지 않기 때문에 나이 든 세대한테만 유리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처럼 독일은 학생들을 민주 시민, 세계시민으로 길러내는 것을 교육의 중요한 목표로 삼고, 학생들의 정치 활동을 적극적으로 보장하고 장려한다. 바로 이러한 정치교육 덕분에 독일은 가장 높은 정치의식을 가진 시민을 길러낼 수 있었고, 이런 성숙한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정치적 안정을 이룰 수 있었으며, 이를 토대로 세계 최고의 경제 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오늘의 독일을 만든 비판 교육

이처럼 독일의 발전에 토대가 된 정치교육은 무엇보다도 ‘비판 교육’에 기반을 두고 있다. 세계에서 ‘비판’을 교육의 기본 원리로 삼는 나라는 독일밖에 없다. 교육의 핵심 목적을 비판 의식을 함양하는 데 둔다는 것은 다른 나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일반적으로 교육 목표는 어디서나 ‘적응’에 있는 법이다. 기존 질서와 규범을 익혀 잘 적응하도록 하는 것, 보통 ‘사회화’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 교육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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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독일에서는 ‘적응’보다 ‘비판’을 더 중시한다. 기존 질서에 대해 비판적 안목을 기르는 것,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 이것이 독일의 비판 교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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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교육은 비판적 사유 능력을 기르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학생에 대한 평가 방식도 우리와는 완전히 다르다. 사지선다, 오지선다 같은 선다형 문제는 전혀 없고, 단순한 지식을 묻는 단답형 문제도 거의 없다. 단순한 지식을 묻는 것은 위험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입식 교육에 상응하는 평가 방식이고, 주입식 교육은 파시스트 교육의 전형이기 때문이다. ‘모든 지배적 지식은 지배하는 자의 지식’이라고 여기므로 지식 그 자체보다는 특정 지식이 지배적인 지식이 된 경로를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독일은 통상 세계 최고의 수출국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그렇다면 독일의 최고 수출품은 과연 무엇일까? 메르세데스-벤츠, 아디다스나 지멘스 등 여러 가지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독일의 가장 빛나는 수출품은 단연 독일 헌법 제1조라고 생각한다. 바로 “인간 존엄은 불가침하다”라는 조항이다. 이 헌법 제1조가 유럽연합의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유럽 헌장’ 제 1조에 적시되어 있다.

독일이 100만 명의 난민 기적을 이룬 바탕에는 인간 존엄을 지키는 것을 국가의 존재 이유로 삼은 국민적 합의와 시민 의식이 있었으며, 이런 높은 정치의식을 지닌 시민을 길러낸 것이 바로 비판 교육이다.

우리에게 안나 뤼어만 같은 고등학생 국회의원은 불가능한가? ‘한국의 안나’가 탄생하려면 적어도 세 가지 조건을 우선 충족해야 한다. 첫째, 피선거권을 열여덟 살로 낮춰야 한다. 선거권·피선거권을 열여섯 살로 낮추는 세계적 추세에 비춰보면 선거권 열여덟 살, 피선거권 스물다섯 살이라는 우리나라의 현행 제도는 시대착오적인 면이 있다. 둘째, 초등학교 때부터 정치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학교는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곳이 아니라, 성숙한 민주 시민을 길러내는 곳이어야 한다. 셋째, 정치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 정치 혐오를 더 세련된 정치적 취향인 양 조장하는 사회는 수상한 것이다.

우리 근대사를 돌아보면 10대는 기실 언제나 정치 변화의 기폭제였다. 3·1운동 이후 일제에 대한 최대 규모의 저항 운동인 광주학생운동을 주도한 세대도 광주제일고등학교 학생들이었고,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것도 마산상업고등학교 1학년생 김주열의 죽음이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에서도 고등학생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오늘 이 나라의 정치 세계에 10대는 없다. “입 닥치고 공부나 하라”는 것인가? 젊은이들을 정치적 몽매 상태에 묶어두려는 자들은 누구이며, 이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 이 글은 유사한 주제를 다룬 칼럼이나 저서 등을 재구성하고, 새로운 내용을 보완한 것입니다.

김누리

중앙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이며, 독일 유럽연구센터 소장을 맡고 있다. JTBC 〈차이나는 클라스〉의 ‘독일 2부작’ 강의로 한국 문화와 사회 시스템에 대한 비판적 분석과 통찰을 전해 뜨거운 화제를 모았다. 최근작으로 정치적·경제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행복하지 않은 ‘이상한 나라’ 대한민국의 불편한 진실을 파헤친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가 있다.

  • 2020.09.21
  • Writer. 김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