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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yes — Issue 17. 사이의 세대

우리가 아는 록 페스티벌

Rock Festivals as We Know Them

  • 2020.08.16
  • Writer. 김작가

이제 그런 여름은 없다. 그때 청춘들은 부모가 됐고, 그 시절을 서랍 깊숙이 보관하고 있을 뿐이다.

2016년 7월 지산밸리 록 페스티벌, 첫날의 헤드라이너는 레드 핫 칠리 페퍼스였다. 1990년대 얼터너티브 시대의 지배자 중 하나이던 그들을 보기 위해 얼추 1만 명 정도의 인원이 모였다. 2002년 첫 내한 공연을 가진 후 14년 만의 한국 방문이었다. 그때의 청춘들은 이제 대부분 가정을 꾸려 남편 또는 아빠가 됐다. 1999년 인천 트라이포트 록 페스티벌과 2006년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 같은 한국 록 페스티벌의 여명을 함께한 세대들이었다. 레드 핫 칠리 페퍼스는 히트곡들을 쏟아냈다. ‘Buy The Way’, ‘Californication’, ‘Under The Bridge’를 가슴이 웅장해지도록 따라 불렀다. ‘Suck My Kiss’, ‘Scar Tussue’에 무릎이 아플 때까지 그루브를 탔다. 앙코르 마지막 곡으로 연주한 ‘Give It Away’가 끝나고 그들이 퇴장했다. 주변을 둘러봤다. 여느 페스티벌에 비해 평균연령이 다소 높은 관객들의 얼굴에는 회환과 행복이 적절히 섞여 있었다. 여기에는 2002년 그들의 첫 내한공연을 잠실에서 함께한 사람들도, 또 그들의 음악에 영향을 받아 밴드를 결성한 친구들도 있을 것이다. 2000년대 중반 시작한 페스티벌 시대에 첫 차를 타고 함께한 이들일 것이다. 그 모든 이에게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공연은 록 페스티벌 전성기 관객들이 함께하는 동창회나 마찬가지였다.

1980년대와 1990년대는 록의 황금기였다. 건스 앤 로지스와 메탈리카, 너바나와 레드 핫 칠리 페퍼스가 영웅이었다. 지금의 10~20대가 힙합에 열광하듯, 한 반에 몇 명씩은 록 마니아가 있었다. 신촌과 대학로의 LP 바는 그런 음악 애호가들의 소굴이었고, 월말이 되면 학교 앞 서점가에는 록 음악 전문지가 깔리곤 했다. 그런 시절을 겪고 자란 이들의 소망은 한국에서 록 페스티벌을 개최하는 것이었다. 1969년 우드스톡 페스티벌 공연 영상을 마치 신의 언행처럼 돌려봤다. 잡지에서 소개하는 레딩 페스티벌과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 화보를 마치 낙원의 풍경처럼 넋 놓고 바라본 이들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금지된 것들에는 환상이 가득했다. 1990년대 중반 홍대 앞에서 크라잉넛, 노브레인으로 대표되는 인디 음악이 탄생했다. 한국에도 밴드 붐이 불었고, 이 환상은 눈덩이처럼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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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밴드들을 바탕으로 해외의 스타 밴드와 함께 페스티벌을 열고자 하는, 일종의 시대적 열망 같은 것이 꿈틀거렸고 점차 자라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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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트라이포트 록 페스티벌

그 꿈은 1999년 7월 이뤄졌다. 딥 퍼플, 드림 시어터,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 프로디지 등 당대 최고의 밴드들이 한꺼번에 한국에서 공연하는 인천 트라이포트 록 페스티벌이 열린 것이다. 이 소식이 발표됐을 때의 상황을 비교하자면 훗날 뉴욕 타임스스퀘어에 삼성과 LG 광고가 걸렸을 때 어떤 한국인들이 느꼈을 감정 같은 것이었다. 국뽕이 차오르고 록뽕이 타올랐다. 주말 클럽 공연이 끝난 후에는 밴드건 관객이건 삼삼오오 모여 마치 메시아를 기다리는 난민처럼 트라이포트에 대한 기대감을 터뜨리곤 했다.

드디어 운명의 날이 밝았다. 7월 30일, 송도시민공원으로 향하는 내내 하늘은 어두컴컴했다. 언제 비가 쏟아져도 이상할 것 없는 날씨였다. 아니나 다를까, 도착과 동시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빗방울은 포르쉐의 제로백 스피드의 굵은 빗줄기로 변했고 바로 폭우가 됐다. 땅은 금세 펄밭으로 변했다. 배수 시설은커녕 잔디도 제대로 깔려 있지 않은 맨땅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무대엔 이렇다 할 천장도 없었다. 비가 고스란히 무대로 쏟아졌다. 첫날 라인업은 딥 퍼플, 드림 시어터, 김종서, 시나위, 매드 캡슐 마케츠, 애시, 윤도현밴드, 크래쉬, 자우림, 크라잉넛, 노이즈가든이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1990년대를 총망라하는 대단한 팀들이었지만 이날 해외 밴드를 제외하고 실제 공연을 한 팀은 크래쉬가 유일했다. 폭우 때문에 국내 팀들의 공연이 다 취소되고, 그나마 해외 팀들의 공연도 지연과 중단을 반복해야 했다.

그러나 기획자들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더 이 땅의 첫 록 페스티벌에 가슴이 벅차올랐던 관객들은 드림 시어터와 딥 퍼플의 공연을 기다렸고, 엠티비 파티 존에서 록 디제잉에 맞춰 노래하고 춤을 췄다. 물론 펄밭에서 추는 춤이었기에 발이 진흙 속으로 빨려 들어갈 때마다 신발은 자취를 감추기 일쑤였다. 폭우로 인해 공연을 중지시키려는 진행 요원을 제지한 채 노래를 계속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두고두고 회자될 딥 퍼플의 무대를 끝으로 어쨌거나 저쨌거나 첫날 공연이 끝났다.

텐트촌 역시 물바다였지만 몸을 뉠 텐트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모두가 젊었던 시절이다. 젖은 옷을 말리지도, 흙투성이가 된 몸을 씻지도 못하고 잠들다니, 제대로 우드스톡의 히피 체험을 하는 기분이었다. 그 와중에도 장대비는 드럼 소리만큼이나 우렁찼다. 그래도 설렘은 멈추지 않았다. “내일이면 어쨌든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과 프로디지라고!” “그 형들이 우리 행색을 보면 기특해서라도 앙코르 두 곡 정도 더 해주지 않을까.” 록 스피릿으로 가득 찬 대화로 모든 고난을 이겨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냥 비가 아니었다. 한강 다리가 넘치네 마네 하는 뉴스가 나올 만큼의 대폭우였다. 텐트촌에는 새벽에 비상 대피령이 떨어졌다. 결국 취소 공지가 났다. 오랜 열망에 대한 보상치고는 너무나 허탈한 끝이었다. 건국 이후 첫 대형 록 페스티벌은 야심만큼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마치 록의 신이 한국을 버리기라도 한 듯했다. 트라이포트 록 페스티벌를 열망했던 이들에게 큰 상처를 입혔다. 자조를 안겼다. 돌이켜봐도 역시 무모한 기획이었다. 그 무모한 시도는 다만 해외 팀을 섭외할 수 있는 기회만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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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 앞을 중심으로 세대 교체된 록 문화, 즉 인디가 꽃을 피웠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때의 홍대 앞이 있었기에 트라이포트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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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

트라이포트는 단순히 시대를 앞서간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때의 처절한 실패가 7년 후인 2006년,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로 이어졌다. 트라이포트의 악몽을 현장에서 겪은 이들, 그 악몽을 직간접적으로 전해 들은 이들 모두가 반신반의했다. 스트록스, 프란츠 퍼디넌드, 플라시보, 블랙 아이드피스... 화려한 라인업이었다. 장소도 인천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여지없이 첫날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하루 종일 내렸다. 정말 지긋지긋했다.

1999년, 일찍이 이 록의 불모지에 내렸던 신의 저주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것 같았다. 심지어 공연이 끝나면 잦아들다가도 다른 공연을 시작하면 쏟아지기 일쑤였다. 폭우 시에도 공연할 수 있는 건물이라고 볼 수 있는 형태의 무대 덕에 공연이 중단되지는 않았다. 버티는 건 오직 관객의 몫이었다. 모두가 비옷을 입거나 우산을 쓰고 장화를 신은 채 비를 맞고 진흙 위를 걸었다. 힘들지만 마치 록의 신이 내린 시련을 이겨내고 가호를 얻겠다는 듯 모두가 무대 앞을 지켰다. 첫날 헤드라이너이던 스트록스가 공연을 할 때 가장 강한 비가 내렸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오후가 되니 남아 있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2000~3000명 정도의 관객은 떠난 이들의 몫까지 열정을 전했다. 밴드도 감명했다. 보컬 줄리안 카사블랑카는 예정에 없던 노래를 부른 것도 모자라 무대 밑으로까지 내려왔다. 폭우 속 관객들과 함께하겠다는 듯 물병을 자기 머리에 쏟았다. 공연이 끝나고 퇴장하던 드러머 파브리지오는 걸음을 멈추고 마이크를 잡았다. 한국말로 또렷이 말했다. “고맙습니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였다. 이 한국식 인사법은 마치 록의 신이 전하는 감사 같았다. 거짓말처럼 다음 날부터 날이 개었기 때문이다.

인파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얼추 2만 명이 토요일과 일요일의 펜타포트를 즐겼다. 마지막 날의 헤드라이너이던 프란츠 퍼디넌드는 쉴 새 없이 댄서블한 사운드를 쏟아냈다. 공연이 절정에 달했을 때 보컬 앨릭스 카프라노스는 외쳤다. “Burn This City!” ‘Take Me Out’이 연주됐다. 송도가 불탔다.

공연이 다 끝난 후, 퇴장하라는 진행 요원들의 지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빅 톱 스테이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던 청춘들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한국에서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음악 축제에 도취되었던 3일 밤낮을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거기서 그들은 해방을 맛봤고 동시대의 음악을 만났으며, 청춘의 여름을 만끽했다. 펄밭의 역경 속에서 음악의 기쁨을 맛본 그들은 후유증에 시달렸지만, 자신의 미니홈피나 블로그에 후기를 남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당시 스마트폰과 SNS가 있었다면, 더 많은 사람이 더 많은 순간을 증언했을 것이다. 그 흥분된 문장 하나하나는 록의 신이 비로소 이 땅에서 저주를 거두었다고 축복했다. 그것은 한국에 페스티벌 제너레이션이 탄생했다는 출생신고였다.

두 번의 뜨거운 여름

가끔 생각한다. 1999년과 2006년의 여름을 떠올린다. 우리는 그 비를 맞으며 그 펄밭에서 어떻게 뒹굴 수 있었을까? 결핍 때문이었다. 제한된 정보와 제한된 기회는 멀고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마음을 키우고 구체화시켰다. 그 전 시대의 사람들이 유토피아와 엘도라도를 상상했듯, 우리도 우드스톡 이야기를 들으며 페스티벌이 음악의 이상향이며, 애호가들의 공동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고행도 쾌락이 될 수 있었고, 편의는 사치라 여겼다. 그랬기에 그 열악한 상황에서 수레 앞에 뛰어드는 사마귀 같은 사람들이 나타날 수 있었다. 그들이 깔아놓은 판에 앞뒤 안 가리고 불나방처럼 달려들어 노는 새로운 세대가 탄생할 수 있었다. 페스티벌이 산업이자 여가가 되기 이전에 해외의 음악 팬들이 느꼈을 그 기분을 느끼고 싶다는 간절함이었다. 폭우와 태양의 여름 벌판에서 뜨거운 함성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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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런 여름은 없다. 모든 여름 록 페스티벌은 사실상 사라졌다. 수명을 다했다. 그때의 청춘들은 부모가 됐고, 그해의 여름을 과거의 서랍 속에 보관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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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2016년 지산밸리 록 페스티벌이 열렸다. 레드 핫 칠리 페퍼스 다음 날의 헤드라이너는 독일 출신의 프로듀서 제드였다. 록 페스티벌에 일렉트로닉 뮤지션이 오는 건 흔한 일이다. 하지만 라이브에 가까운 퍼포먼스를 하는 케미컬 브러더스, 언더월드 등과 달리 그는 댄스 클럽에서 쓰는 장비만을 가지고 섰다. 노래 한 곡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디제잉으로 일관했다. 무대 앞에는 전날에 비해 확 어려진 관객들로 가득했다. 어제보다 몇 배는 더 많았다. 녹음된 노래를 따라 부르고, 마치 클럽인 것처럼 춤을 췄다. 무대 위 뮤지션이 실제로 연주하고 노래하는지, 하다 못해 콘솔의 버튼을 조작하면서 라이브 믹싱을 하는지는 그들에게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아는 록 페스티벌에서는 낯선 풍경이었다. 하지만 그 또한 제드를 보러 온 사람들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혼란스러웠다. 곁에 있던 내 또래 관계자가 탄식하듯 말했다. “이제 록 페스티벌이란 건 끝났구나.” 하나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는 기분이었다.

김작가

대중음악 평론가이자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이며, 여름이면 페스티벌을 좇아 아시아와 유럽을 누볐던 페스티벌 키드. 지난 시대의 대중음악과 문화, 새로운 세대의 뮤지션을 넘나들며 대중음악에 대한 날카롭고 유쾌한 시선의 칼럼을 통해 대중과 소통하고 있다.
  • 2020.08.16
  • Writer. 김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