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Decisions for a Self-Directed Life

주도적 삶을 위한 다섯 가지 선택

기존의 교육 틀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배움을 만들어 가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배움이 가르치는 사람의 몫이 아니라 배우는 사람의 특권이라 말한다. 그리고 끊임없는 자기 탐구만이 자신의 미래를 온전히 책임질 수 있다고 믿는다. 자신만의 속도와 리듬을 잃지 않고 삶을 개척해나가는 대안학교 졸업생 5인의 이야기다.

Respecting Things the Way They Are
있는 그대로의 존중
곽푸른하늘 / 뮤지션 / 27세
고양자유학교, 삼무곡자연예술학교

‘없음’을 가르치는 교육

제가 다닌 삼무곡자연예술학교(이하 삼무곡학교)는 강원도 삼척 산속 깊은 곳에 자리해 있어요 삼무곡학교는 없음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데, 여기서 삼무(三無)는 소유·판단·계획 없음을 의미해요. ‘없음’ 에 대한 가치는 ‘오늘 하루’를 충실하게 사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어요. 목표를 세우고 성취하려고 들면 어쩔 수 없이 소유, 판단, 계획에 집착할 수밖에 없거든요. 반대로 오늘 하루에 집중하면 주어진 환경을 어떻게 최선의 방향으로 해석할 것인지 생각해볼 수 있어요. 사실 저희 학교는 교육에 대한 대안을 넘어 삶에 대한 대안을 가르쳐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삶의 지혜를 가르친다고 볼 수 있죠.

저는 삼무곡학교 첫 입학생이어서 지금보다 체계적이진 못했어요. 일반 학교처럼 시간표가 정해진 게 아니다 보니 배우려고 온 학생들 입장에서 조급함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죠. 같이 입학한 친구 중 정해진 시간에 딱 맞춰 사는 부지런한 친구가 있었어요. 늦잠 자는 일도 없었고, 자유 시간에 자기 개발을 하며 하루를 빈틈없이 사는 친구였지요. 그런데 그 친구는 도중에 자기 결에 맞는 곳을 찾아 떠났어요. 산속 깊숙한 곳에서 계획, 소유, 판단 없이 사는 게 사실 겁나는 일이거든요.

삼무곡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왔을 때 부딪힌 문제가 몇 가지 있었어요. 그중 없음을 중시하는 학교 가르침과 달리 계획과 소유를 통해 안정을 추구하는 세상 법칙이 가장 크게 와닿았어요. 저도 한때 좀 더 안정적이고 싶어서 유명한 사람과 작업하거나, 하기 싫은 일을 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계획을 세울 때마다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거예요. 이를테면 돈을 많이 벌려고 열심히 살았는데, 그만큼 지출되는 곳도 많아지는 거죠. 그러면서 다시 한번 느꼈어요. 내 최종 목표가 유명해지거나 돈을 많이 버는 게 아니라는 것을요. 그래서 지금도 매일 연습해요. 하루를 목표 삼아 삼무곡학교에서 배운 없음의 가치를 잊지 않으려고요.

자연스러움 속에서의 나

삼무곡학교 프로그램 중 ‘내 마음대로 살기’라는 게 있어요.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게 뭔지 찾아보는 시간이죠. 개인적으로 저는 ‘내 마음대로 살기’가 너무 어려웠어요. 하루 종일 잠자고, 게임을 하는 게 진짜 원하는 것은 아니었고, 장소도 절묘하게 산속이라 할 수 있는 일도 별로 없었죠. 그때 제가 기타를 배운 지 1년밖에 안 됐어요. 연주가 능숙하진 않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기타 치며 보냈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곡이 나왔죠. 그게 바로 저의 1집 앨범이에요. ‘내 마음대로 살기’를 하면서 제가 진정 하고 싶은 걸 발견했어요. 음악을 내 언어로 삼아 세상에 하나뿐인 존재로 살겠다고 다짐했지요. 음악을 통해 내가 바라는 모습과 세상을 향해 선언을 하겠다고 생각한 거예요.

사실 산속 깊은 곳에서 음악을 시작했지만 “내 영감의 출처는 자연이다”라고 말하지 못하겠어요. 〈온스테이지〉에 업로드된 제 뮤직비디오 대부분이 자연에서 촬영했지만, 제 의도는 아니었거든요. 기획자분들이 제 노래를 들으면 자연스럽게 자연이 떠오른다고 해서 들판이나 바다에서 촬영한 거거든요. 제가 억지로 자연 속에 들어가 바람이 흔들리는 것을 관찰하고, 물 흐르는 소리를 선율로 그려본 건 아니에요. 제 노래 대부분이 그저 우연히 자연에서 만들어진 것뿐이죠. 하지만 스스로 느끼기에도 자연에서 만든 노래가 훨씬 편한 게 사실이에요. 기교가 있거나 세련된 노래보다 뭔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노래가 더 좋아요.

Being Responsible for Privilege
특권을 책임지는 일
김정한 / 청소년 멘토링 '너랑' 대표 / 30세
탄천초등학교, 분당중학교 중퇴, 홈스쿨링 그루학교, 이우학교, 산청 간디학교,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나를 만든 대안교육

중학교 1학년을 다니다가 학교를 그만뒀어요. 제가 배우고 싶은 걸 가르쳐주지도 않고, 서로 눈치 보는 문화를 갑갑하게 느꼈거든요. 저처럼 조금 더 다양한 경험을 하고 싶은 7명이 모여 ‘그루학교’라는 이름으로 홈스쿨링을 했어요. 저희는 배우는 사람과 가르치는 사람을 구분하지 않고, 각자의 관심 분야도 제한하지 않고 배움을 이어나갔어요. 그러다 우연히 연이 닿아 6개월간 성남 이우학교를 다니게 됐어요. 홈스쿨링하는 학생 자격으로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참여한 거예요. 대안학교는 홈스쿨링과 달리 체계적인 시스템이 존재했어요. 교사와 학생의 경계가 분명했고, 명확한 규칙과 교훈이 있었죠. 그때 ‘학교를 다니면 배울 점이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중등 검정고시를 봐 지리산 산청 간디학교에 진학했죠.

특히 간디학교를 다니면서 배운 게 정말 많아요. 가장 기억에 남는 수업은 현재 산청 간디학교 교장이신 정미숙 선생님의 ‘독서’라는 수업이에요. 프랑스 바칼로레아 Baccalaureat라는 시험을 변형한 수업인데, ‘무지는 악인가’, ‘의무를 인정하는 것은 자유를 포기하는 것인가’ 같은 철학적 질문을 정리해 반 친구들에게 강의하는 거였어요. 한 문장에서 시작해 다양한 관점으로 해석하는 과정이 너무 재밌더라고요. 수업을 마치고 선생님께서 “정한이는 가르치는 일을 하면 좋겠다”라고 조언 해주셨어요. 당시 진로와 미래 고민이 많던 터라 선생님의 진심 어린 응원이 꿈을 발전시키는 동기가 되기도 했고요.

저는 스스로를 ‘길 소개꾼’이라고 소개해요. 여기서 길은 교육을 의미해요. 한국 사회에서 남들과 조금 다른 교육과정을 접한 사람으로서 다양한 교육의 길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요. 시스템의 장벽이 너무 높아 대안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에게 길을 제시하고, 그 길을 걸어가려는 이들에게 조금 앞서 걸어간 사람으로서 용기를 주고 싶어요.

길 소개꾼으로서의 도전

제가 대학에 진학한 이유는 매체와 채널에 대해 공부하고 싶어서예요. ‘길 소개꾼’으로 길을 소개하려면 소개하는 방법 자체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의사소통하는 방법으로 면대면 대화도 있지만, 편지를 쓰고, 전화를 하는 방법도 있거든요. 메시지를 전달하는 채널로 라디오, 신문, 잡지, SNS 등을 이해하는 게 길을 소개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어요. 그렇게 신문방송학과에 입학해 영상 촬영과 편집, 뮤지컬 기획과 연출, 글쓰기, 팟캐스트 등 다양한 매체를 공부했어요. 배우고 싶은 게 분명했기에 대학 진학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어요.

대안교육의 선구자로 불리는 양희규 선생님께서 “대안학교의 목표는 대안학교가 사라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대안교육이 더 이상 특별한 교육이 아니라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보편적 교육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였죠. 양희규 선생님의 말씀을 듣기 전까지 저는 홈스쿨링과 대안학교를 접한 남다른 경험을 오로지 특권으로만 여겼어요. 대안교육을 받은 한 사람으로서 지녀야 할 사회적 책임에 대해 생각해보지 못한 거죠. 그런데 뒤돌아보니 홈스쿨링을 하겠다고 했을 때 아낌없이 지원해주신 부모님과 간디학교에서 삶의 지혜를 알려주신 선생님들 덕분에 제가 세상을 조금 다른 관점으로 볼 수 있게 된 거더라고요.

현재 저는 청소년 멘토링 ‘너랑’의 대표로 교육 사업을 진행하고 있어요. ‘너랑’은 청소년과 청년이 스스로 자기 미래를 디자인하도록 돕는 것이 목표예요. 멘토와 멘티의 경계가 없는 게 특징이기도 하죠. ‘너랑’의 멘토는 멘티를 함부로 가르치려 들지 않아요. 기존 교육은 일방적으로 지식을 주입해 탁월한 인재를 배출하는 걸 중요하게 보지만, 저는 모든 사람이 자기 결에 맞게 살도록 돕는 게 교육의 핵심이라 생각하거든요. 멘토와 멘티는 상호작용을 통해 각자의 결을 확인하고,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게 ‘너랑’이 추구하는 방향입니다.

A Farmer's Livelihood
한 농부의 삶터
주하늬 / 농부 / 37세
홍동초등학교, 홍동중학교,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 경북대학교 원예학과

꿈을 심어준 시간들

농부 부모님 밑에서 자란 저는 자연스럽게 농부라는 꿈을 꾸게 됐어요. 아버지는 열 살 생일 선물로 ‘작은 농부 하늬에게’라고 쓴 작은 삽을 주실 정도로 제가 농부의 삶을 살길 바라셨죠. 제가 사는 홍동에는 농업을 전문으로 가르치는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가 있어요. 부모님 모교이기도 하고, 농부가 되고 싶다는 꿈이 있었기에 어려서부터 풀무학교에 가고 싶었어요. 하지만 당시 농부가 되고 싶다고 말하면 주변에서 ‘인생 포기자’로 봤어요. 한번은 초등학교 선생님이 공부 안 하는 친구를 나무라며 “너, 공부 안 해서 풀무학교 나와 농사나 짓고 살래?”라고 혼내셨어요. 농부가 아버지 직업이었고, 풀무학교는 부모님 모교였기 때문에 당시 적잖은 충격을 받았어요. 속으로 끓어오르는 화를 참으며 더 열심히 공부해 ‘풀무학교 출신의 농부’가 되겠다고 다짐했죠. 그리고 보란 듯이 풀무학교에 들어갔어요.

풀무학교는 자연과 농업을 최우선 가치로 여겨요. 유기농업을 가르치고 배운 내용을 토대로 현장 실습을 자주 했어요. 경운기부터 예초기, 용접기, 트랙터까지 다양한 농기계를 다뤄볼 기회가 많았죠. 3학년 때는 스스로 농작물과 가축을 관리해보기도 했고요. 노동의 신성함과 땀의 가치를 몸소 배운 시간이었죠. 무엇보다 나처럼 농부가 꿈인 친구들이 주변에 있다는 게 가장 반가웠어요. 이전까지 부모님 외에 아무도 ‘농부’라는 제 꿈을 응원해주지 않았거든요. 그러나 풀무학교에서 친구들과 함께 농업에 관해 연구하고, 다 같이 땀 흘려 고생한 시간들 덕분에 농부의 꿈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어요.

농촌의 가치를 지키는 일

현재 저는 10년 차 농부예요. 농대를 졸업하고 고향에 돌아와 본격적으로 농촌 일을 배우고 있죠. 그런데 막상 농사일을 직접 하려고 하니 쉽지 않더라고요. 매번 아버지 옆에서 일을 돕기만 했을 뿐, 직접 총괄해 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었거든요. 젊음의 패기와 체력만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던 거죠. 농사라는 게 때에 맞춰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건 한 해에 한 번만 경험할 수 있는 거더라고요. 저는 이제 고작 열 번 배웠으니 앞으로도 배워야 할 시간이 많네요.

요즘에는 ‘억대 연봉 농부’, ‘스마트 농부’, ‘성공한 농부’가 각광받는 시대예요. 그러나 저는 농촌이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한 수단이 되지 않길 바라요. 농업을 오로지 돈벌이로 인식하는 사회 분위기가 땅의 근본과 노동의 의미를 퇴색시킬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죠. 제가 오리농법을 열심히 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으로 설명할 수 있어요. 오리농법이 농약보다 번거로운 일인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제겐 깨끗한 토양을 지키는 것이 훨씬 중요해요. 제가 수확한 농산물 일정 부분을 굳이 직거래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죠. 소소한 직거래로 소비자를 만나 제 농산물의 가치를 소개하는 걸 아주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제 방법이 조금 수고가 필요한 일이라는 건 분명해요. 하지만 이러한 수고가 세상이 ‘농부’라는 직업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데 보탬이 될 거라 믿어요.

The World Is My Classroom
세상을 배움터로 삼다
신지우 / '지우컴퍼니' 출판사 대표 / 21세
포이초등학교, 청량초등학교, 포두초등학교, 포두중학교 중퇴, 숨쉬는학교(가명)

운명 같은 100일의 시간

제가 다닌 숨쉬는학교(가명)는 100일 단기간 프로젝트로 시범 운영하는 곳이었어요. 연령별로 반을 나눠 미술·명상 수업을 하기도 했고, 때때로 다 같이 모여 텃밭을 가꾸기도 했죠. 특이한 건 선생님을 ‘안내자’로 부른다는 점이에요. 선생님이 어떤 자격이 있어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과 함께 걸으며 길을 안내하겠다는 취지죠. “나는 공부 잘하는 아이를 좋아한다”라고 말하던 이전 학교 선생님을 생각하면 당시 너무나 충격적인 개념이었어요. 100일의 시간을 보내면서 그간 수직적인 교육 방식, 권위적인 선생님, 또래들의 뒷담화 문화 등에 지쳐 있던 제 모습을 발견했어요. 숨쉬는학교에서 아주 조금이라도 삶의 대안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렇게 저는 숨쉬는학교에 남아 4년을 보냈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중학교 3학년 졸업 여행이에요. ‘공부하러 놀러가요’라는 이름을 붙일 정도로 공을 많이 들인 프로젝트였거든요. 여행지 공부를 위해 다큐멘터리를 새벽 1시까지 꾸벅꾸벅 졸면서 보기도 했고, 여행 경비를 모으려고 마을 축제에서 어묵탕을 팔기도 했어요. 한 달간 태국, 베트남, 캄보디아 동남아 3개국을 여행하고 돌아와 여행기를 전자책으로 엮었어요. 저는 평소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서 삽화와 표지 만드는 작업을 맡았죠. 책을 출간하고 작업물을 천천히 보면서 생각해봤어요. 외부 전문가의 도움 없이 만든 작품이라 완벽하진 않지만,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제 재능이 순간 소중해 보이더라고요. 이 일을 계기로 한 출판사 직원분에게 책 표지 작업을 의뢰받기도 했어요. 적은 금액이었지만 제 그림으로 돈을 번 첫 번째 경험이었어요.

테두리 밖에서의 배움

대안학교를 다닌 지 4년 차에 접어들면서 진로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학교에서 인문학 책을 읽고 토론하는 수업이 있었는데, 스스로 질문하는 습관이 삶에 대한 철학적 질문으로 이어졌어요. ‘사람이 사는 이유는 뭘까’, ‘사람이 추구해야 하는 진리가 있을까’라는 근본적인 고민을 한 거죠.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명쾌한 답을 얻을 수 없었어요. 철학과에 가면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대학에 가려고 했는데, 고민을 하면 할수록 의문은 더 커졌어요. 질문을 하고 답을 찾고 싶어서 대학에 가는데, 답으로 등수를 매기는 대학 교육이 제가 원하는 인생의 답을 줄 수 없을 것만 같았거든요. 결국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대학에 가는 것보다 제가 원하는 타이밍에 맞춰 살리라 결심했어요. 세상에 나와 몸소 배우는 경험이 삶에 대한 근본적인 답을 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저는 지금 제주에서 웹툰 작가,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 강연자, 기획자, 그림 선생님, 출판사 대표 등 여러 직업에 종사하며 다양하게 세상을 경험하고 있어요. 물론 시작이 순탄치만은 않았어요. 열일곱 살에 디자인 회사에 취직했는데, 어린 나이에 사회생활하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하지만 저는 계속 부딪쳐보고 싶었어요. 제주로 터를 옮겨 프리랜서 외주 작업도 해보고, 1인 출판사를 차려 《대안학교는 처음입니다만》이라는 단행본을 출간하기도 했죠. 저는 끊임없이 도전하고 성장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배움터가 대학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언제든 대학에 가고 싶고요. 하지만 제도권의 한계에 갇혀 테두리 밖에 있는 좋은 것을 놓치고 싶지 않아요. 나에게 주어진 장애물에 주저하지 않고 오히려 성장 동력으로 생각하고 싶어요.

Separating Myself from My Parents
부모와 나를 분리하는 과정
라유 / 파주 타이포그라피(PaTi)학교 재학생 / 19세
파주 자유학교, 성미산학교, 코스타리카 홈스쿨링, 파주 타이포그라피학교

주체적인 첫 선택

저는 초등학교 때까지 아무런 의심 없이 부모님이 하라는 대로 하면서 살았어요. 일곱 살 때 파주 자유학교를 다닌 것을 시작으로 성미산학교에서의 8년 모두 부모님의 권유로 시작한 거예요.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점점 생각이란 걸 하게 됐어요. 대안학교만 다니다 보니 고립감을 느끼는 것 같고, 좀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게다가 우리나라 교육 시스템은 대학 입시에 집중돼 있다는 걸 알면서, 진로에 대해 좀 더 곰곰이 생각해보게 됐어요.

성미산학교에서 중학교 과정을 마칠 즈음, 부모님은 제게 코스타리카에 한번 가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하셨어요. 엄마는 제가 코스타리카에서 평화, 인권, 자연 등의 가치를 몸소 배우길 원하셨죠. 그런데 전 코스타리카에서 3개월을 못 버티고 한국으로 돌아오고 말았어요. 그때 제가 한창 패션에 관심이 많았는데, 패션 공부는 자연보다 도시에서 배울 게 많을 것 같았거든요. 화산 근처라 자연이 잘 보존되어 있어서 평화와 자연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었지만, 패션에 관심이 많던 열일곱 살의 라유에게 적합한 곳은 아니었어요.

코스타리카에 남지 않겠다는 결정은 제가 처음으로 한 주체적인 선택이에요. 그전까지 전 부모님 말씀을 잘 듣는 모범생이었어요. 엄마가 하신 말씀이 무조건 옳은 거라고 믿으며 살았거든요. 그런데 엄마 말대로 코스타리카에 갔는데 나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거예요. 부모님이 나한테 가르쳐주고 싶은 거랑 내가 세상에서 배우고 싶어 하는 게 다르구나 생각했어요. 그때 처음으로 나랑 엄마는 다른 사람이라는 걸 인지하고 깨달았어요.

합리적으로 설득하기

나이가 들면서 부딪히는 가장 큰 어려움은 경제적 문제였어요.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려면 어쩔 수 없이 부모님께 손을 벌려야 했죠. 자아와 취향이란 게 생기면서 부모님을 설득해야 하는 상황도 많아졌고요. 그때마다 전 부모님께 지원 사업서를 건네드렸어요. 예를 들어 검정고시를 보려는 이유부터 시작해 인터넷 강의 목록, 수강료, 그리고 공부 기간까지 최대한 구체적으로 부모님께 말씀드렸어요. 심지어 잉여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지조차 말씀드려 부모님을 안심시켜드렸어요.

하고 싶은 일은 누구나 있기 마련이에요. 그런데 저는 하고 싶은 게 그저 느낌이 되지 않도록 애썼어요. 자식이 하고 싶은 걸 무조건 반대하는 부모는 이 세상에 없어요. 하지만 부모 입장에서 본능만 좇아 살려는 자식이 불안해 보이는 건 당연한 일이죠. 저 역시 부모님께 건넨 사업서가 반려된 적이 있어요. 미래에 도움이 안 될 것 같은 취미 활동은 한 번 더 생각해보라고 하셨어요. 지금 다니고 있는 파주 타이포그라피학교에 가겠다고 했을 때도 부모님은 반대하셨지요. 비인가에 학위도 나오지 않는 이른바 ‘대안 대학교’라고 불리는 곳이었거든요.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저는 제가 앞으로 배우고 싶은 일을 구체적으로 설명해드렸어요. 부모님을 설득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제 선택에 대해 다시 한번 면밀히 생각해볼 수 있었어요. 동시에 부모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훈련도 한 것 같아요.

사실 지원 사업서라는 아이디어를 생각할 수 있었던 건 어릴 때부터 부모님과 논리적으로 대화했기 때문이에요. 우리 대화에는 ‘너는 너고 나는 나다’라는 전제가 깔려 있어요. 자식이고 부모이기 이전에 개인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매번 확인시켜주셨지요. 그러다 보니 감정적 대화보다 문제 해결 위주의 논리적 이야기를 자주 했어요. 물론 어린 나이에 공감받기 위해 한 말인데, 되레 제 잘못을 꾸중하신 적도 있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