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Coming of Age Story: My Cars

나의 탈것 성장기

더 크고 더 잘 달리고 더 비싼 차가 아닌, 더 ‘사연’ 있는 차를 타고 싶다.

01-01

1996년 여름, 아버지가 있었다. 그해의 여름은 꽤 무더웠다. 봄에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까지 8 개월 정도의 틈이 있었다. 아르바이트를 했고, 그렇게 번 돈으로 삼성 애니콜 휴대폰을 구입했다. 삐삐와 시티폰의 시대가 저물고, 휴대폰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당시 개통한 휴대폰은 꽤 묵직했고, 들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뭔가 있어 보였다. 두 번째 시도한 것이 1종 보통 운전면허를 따는 일이었다. 주행 시험용 차량은 1톤짜리 수동 트럭이었다. 트럭 운전석에 앉아 보행자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거나, 주행 코스이던 번잡한 재래시장의 2차선 도로를 지날 때면 어찌나 진땀이 나던지! 차 시동을 몇 번이나 꺼트려 주행 시험에서 대여섯 차례 낙방했다. 의기소침해진 아들이 안쓰러웠던지, 아버지는 1톤 트럭을 구해 옆자리에 동승하는 것으로 아들의 주행 시험 합격을 기원했다. 그때는 운전면허를 따는 것에 정신이 팔려 다른 풍경을 보지 못했다. 뒤늦게 그 무덥던 여름을 떠올리니 나의 첫 운전면허증과 아버지가 떠오른다. 아버지와 한 공간에서 그렇게 밀착된 시간을 보낸 적이 많았던가.... 거기, 젊은 시절부터 몸이 약해 늘 마른 체구였으나, 자식만은 항상 따뜻하게 바라보던 아버지가 있었다.

내가 처음 차를 소유한 것은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나서였다. 첫 차는 폭스바겐 골프 GL 해치백 모델이었다. 이후에도 해치백 스타일을 꽤 탔으니, 해치백은 내가 좋아하는 디자인이었다. 첫 차를 구입하고 들떠 있던 나는 홀로 긴 휴가를 떠났다. 제법 찬 바람이 불던 초겨울이었다. 조수석에는 《곽재구의 포구 기행》이 놓여 있었다. 곽재구 시인은 작은 포구들에서 만난 풍경과 사람을 통해 우리가 잃어버리고 사는 소중한 것을 발견하라고 부추겼다. 책 어딘가에 나오는 “과거를 회상하는 버릇은... 모든 슬픈 짐승들의 운명” 같은 말에 훅 끌린 탓도 있었다. 30대의 나도 외로웠다. 책에 등장하는 포구를 그대로 따라가는 여정을 잡았다. 목적지는 구룡포였다. 경주를 경유해 구룡포를 찍고, 외로움이 잦아들 때까지 여행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현대인이 잃어가는 ‘날것’을 찾는 여정이니 몸도 부대끼기로 했다. 여행 하면 떠올리는 근사한 숙소 같은 건 잡지 않기로 하고 트렁크에는 두툼한 침낭을 챙겼다. 가능한 한 며칠은 침낭을 덮고 차에서 노숙 할 계획이었다. 첫날 밤을 보낸 곳은 경주의 한 유적지 주차장이었다. 그날 밤엔 보슬비가 내려 구룡포의 하늘도 맑지 않았다. 빗방울이 거세지는 풍경을 마주하며 책에 등장하는 멸치잡이 어선을 찾았다. 선장을 만나면 배를 태워달라 부탁하고, 며칠 바다 일을 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려 했으나, 거세지는 빗방울에 그만 포기하고 말았다. 그때 용기를 냈다면 더 많은 ‘사연’ 을 간직했을 텐데, 시도하지 못한 삶은 아쉬움을 남긴다. 그러다 지쳐, 또 책에 나오는 다방을 찾아 들어갔다. 다방의 여주인장과 책의 기억을 더듬으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가져간 노트에 그날의 인상적인 이야기를 적어둔 것 같은데, 그때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지금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구룡포를 찾은 시인은 “외로움이 찾아올 때, 사실은 그 순간이 인생에 있어 사랑이 찾아올 때보다 더 귀한 시간”이라고 말했다. 고백하면, 혼자 떠난 포구에서 그런 시인의 언어를 발견하지 못했다. 노숙한 몸은 감기에 걸렸고, 3일째는 찜질방에 몸을 뉘어야 했다. 그게 외로운 30대의 진통 같은 것이었을까?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그 답을 얻지는 못했다.

그동안 꽤 다양한 차를 탔다. 잠시 사정이 생겨 뚜벅이 생활을 하던 내게 친구가 분양해준 구형 프라이드, “남자는 수동이지!”라거나 “독일 차는 한번 타봐야지”라며 선택한 BMW 1 시리즈 해치백, 캠핑과 낚시라는 아웃도어 라이프를 핑계로 구입한 사륜구동 SUV까지.... 평범한 내 나이 또래에 비해서는 많은 차종을 경험했다. 마흔이 가까울 무렵, 벤츠 클래식카를 구입할 뻔했다. 각진 스타일에 빈티지한 멋을 한껏 풍기던 벤츠 300SEL 모델이었다. 차량 정비를 위해 들른 장안평의 한 카센터에 그 차가 놓여 있었고, 첫눈에 반했다. 정비사는 주인이 애지중지하는 차인데, 얘기를 잘하면 팔 수도 있을 거라고 말했다. 잠시 자동차 키를 빌려 주변 한 바퀴를 돌아보았다. 파스텔 톤의 가죽 시트를 포함해 실내는 자체로 빈티지했고, 엔진 소리는 중후했다. 1980년대 탄생한 벤츠의 명성이 있지만, 주인장의 곱디고운 애정이 그대로 느껴지는 차였다. 연식 대비 관리를 잘해 1000만 원이 훌쩍 넘는 가격이었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일본 만화 《H2》가 있다. 야구와 첫사랑을 다룬 이 만화에서 주인공 소녀의 삼촌이 야구 감독으로 등장하는 장면을 기억한다. 어느 뜨거운 여름이었다. 선글라스를 낀 삼촌은 벤츠 올드카에 앉아 창문을 모두 열어젖힌 채 한쪽 다리를 걸치고, 좋아하는 음악을 신나게 틀었다. 40대로 짐작되는 느긋한 삶이 거기 있었다. 나도 그 나이가 되면 그런 느긋하고 오래된 풍경으로 살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야구와 빈티지, 풋풋한 첫사랑의 감정들. 카센터에 주차된 벤츠 클래식카가 그 모든 장면을 기억하게 만들었다. 벤츠 올드카를 타는 것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불발이 되었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는 그 빈티지하면서 느긋한 삶의 태도를 기대하고 있다. 올드카를 탄다는 것은 일부러 오래된 풍경을 간직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요즘은 1997년식 구형 프라이드(수동)를 탄다. 옛것 그대로의 순정은 아니다. 이전 주인이 도색을 하고 시트와 휠 등을 적당히 손본, 내 눈에는 아주 적당한 튜닝 카다. 아내의 최신 차와는 별도로 이 차는 정말 나 혼자를 위한 차로 구입했다. 차의 오디오 시스템은 카세트테이프다. 차를 구입하고 가장 돈 들인 일은 지금은 잊힌 카세트테이프를 구하는 것이었다. 1990년대 즐겨 듣던 레퍼토리들, 들국화·부활·전람회·신승훈·변진섭 등의 테이프를 구하느라 제법 고생을 했다. 중고 만물상이 자리한 황학동에 들렀더니, “〈응답하라〉(tvn)의 OST가 방송된 후 당대의 테이프를 다들 사가서 아마 구하기 힘들걸요”라는 말을 들었다. 인터넷을 뒤져 개인 거래로 일부 테이프들을 구할 수 있었다. 테이프를 집어넣으면 딸칵! 하는 복고 음이 울린다. 1991년 발매된 신승훈의 2집 〈보이지 않는 사랑〉의 전주곡이 흘러나오고, 바로 울컥해진다. 이 ‘짠 내’ 나는 아저씨를 어떡할까. 볼륨을 최대로 높이고 거리를 달렸다. “어제는 괜찮았어. 오늘도 나쁘지 않아”라며, 나를 다독이던 날들이다.

가끔 조수석에 타려는 여인이 있다. 17개월 된 내 딸이다. 나는 아버지가 되었고, 좁은 공간에는 딸이 타는 시간이 쌓이고 있다. 딸은 차에 타는 걸 좋아한다. 아빠 무릎에 앉아 고사리손으로 운전대를 돌리거나 클랙슨을 누르며 헤죽거린다. 2017년 여름, 내 차엔 딸이 있다. 앞으로 20년 정도 이 차를 굴리다가, 딸이 성인이 되고 운전면허를 따면 물려줘야지. “아빠, 이런 똥차는 안 탈래” 하면 뭐 어쩔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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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승민

잡지와 출판 에디터로 인생 전반전을 살았다. 후반전에는 뭘 해야 하나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중이다. 《그리스인 조르바》 의 조르바처럼 살고 싶으나, 감당 못 할 팔자라는 것쯤은 안다. 커가는 딸이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에서 살아가기를... 지금은 그걸로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