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Philosopher’s Confession About Education

교육에 관한 한 철학자 아버지의 고백

취학 전에는 아이가 무엇이든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가 축구 대표 선발에 떨어진 이후 생각이 달라졌다.
'아이의 자존감' 앞에서 나의 교육 철학이란 것이 헝겊 막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이가 학교 축구 대표 선발전에서 떨어졌다
아이는 축구 대표로 뽑히기 위해 한여름 내내 더운 줄도 모르고 공을 차고 또 찼다. 선발전 날 아침, 학교로 와서 응원해달라는 아이의 부탁에 시간을 내어 갔다. 친구들에 비해 드리블이 느렸다. 그리고 슛은 골대를 자주 빗나갔다. 연습 경기에서 아이의 포지션은 수비수였다. 화려하고 빠른 드리블로 상대편 공격수가 아이를 제칠 때면 관중석에 있는 내 몸이 나도 모르게 아이를 따라 움직였다. 아이가 태클을 당하면 내 몸도 움찔했다. 선발전이 끝나자마자 아이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여보, 이번에는 어렵겠다.”


하지만 아이의 생각은 나와 달랐다.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물었다. “아빠, 나 그 공격수 그때 잘 막았지?” “아빠, 이번에 뽑히면 나는 어느 포지션 맡을 것 같아?” 아이는 결과 발표가 나오기 전까지의 조마조마한 마음을 아빠의 확답으로 누르고 싶었겠지만 나는 늘 말을 돌렸다. 며칠 후 선수 명단이 발표됐다. 집에 돌아온 아이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여름 햇볕에 그을린 것보다 더 새까만 얼굴이었다. 열 살 아이의 침묵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아이에게 실패란 있을 수 없으며, 다만 ‘경험’이 부족할 뿐이다. 아이에게 좌절의 경험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 아이는 좌절 속에서 자라난다. 아슬아슬하게 실패한 이후에 이뤄낸 목표 성취는 도전하는 힘을 길러줄 것이다.” 아이의 까매진 얼굴을 보며 혼자 떠올린 말들이다. 솔직히 말해 아이의 실패를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말들을 아무리 떠올려보아도 조금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아이에게 실패는 있을 수 없다는 말은 경험이 부족한 아이에게 부모가 경험을 더 제공해줘야 한다는 뜻으로 읽혔다.


실패 이후에 이뤄낸 성취가 도전하는 힘을 길러준다는 말은 아이가 다음 시도에서는 반드시 성공하도록 도와줘야 한다는 말로 들렸다. 아이가 ‘이겨서’, 아이가 ‘자존감’을 갖도록 도와줘야 한다. 나는 새로운 과제를 마주한 채 잠들었다.

그렇다, 모든 것이 자존감 때문이다
자존감과 연결되면 마음의 요동이 감지된다. 축구 대표 선발전 이전만 하더라도 아이가 축구 대표가 꼭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이가 취학하기 전만 하더라도 공부를 잘해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림을 반드시 잘 그려야 한다고도, 피아노 연주도 능숙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고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저 즐기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축구 대표로 선발되지 않은 이후에는 나도 모르게 생각이 달라져 있었다. ‘아이의 자존감’을 위해 다음번에는 축구 대표로 꼭 선발되어야 한다. 다른 아이보다 공부를 더 잘할 필요는 없지만 자존감을 위해 공부는 잘해야 하는 것이 되었다. 실패가 실패로 끝나지 않고, 못남이 못남으로 끝나지 않고, 무능이 무능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실패와 못남과 무능을 극복해 아이의 자존감이 성장하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부터 나는 그동안 견지해오던 아이에 대한 교육 철학이 이리 흔들면 이리로, 저리 흔들면 저리로 흔들리는 헝겊 막대에 불과한 것임을 깨달았다.


나는 내 아이가 주류가 되어야 한다고 정말로 지금껏 단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다. 그 대신 축구 대표로는 뽑혀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공부도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자존감이 높은 아이가 되니까. 주류가 될 필요는 없지만 주류가 되어야 한다는 내 마음속 메커니즘에서 작동하는 모순은 자존감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다. 그러는 사이 우리 집 풍경은 여느 집과 비슷하게 되었다. 문제집이 쌓이고, 학원 차가 오고, 놀이는 학습으로 바뀌고, 아이의 행복보다는 자존감이 더 중요해진 집이 되었다. 좀 다르게 키워보고, 다르게 교육시켜보겠다는 마음으로 육아책까지 썼는데, 사실은 주류 지향의 삶에서 한 발짝도 떨어지지 못했다. 부끄러울 따름이다.


이제야 비로소 선배 부모들이 왜 아이에게 그렇게나 뭘 시키는지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그들 역시 내 아이가 다른 아이를 이겨야 한다는 바람 따위는 애초부터 없었을 것이다. 대신 아이가 ‘져서’ 마음이 다치는 것은 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아이가 ‘졌다는 것’을 자아상으로 삼을까 봐, 아이가 ‘지는 아이’로 낙인찍힐까 봐 그게 걱정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이 사회의 주류가 되기 위한 경쟁을 싫어하면서도, 이 교육 방식에 반대하면서도 학교에 보내고, 공부에 열을 내고, 입시에 삶을 건 것이다.

내게 대안이 필요해졌다
아이가 슛을 할 때마다, 드리블을 할 때마다, 태클에 걸려 넘어질 때마다 내 몸이 움찔 따라 움직이는 것을 느끼며 이 모든 것을 그만둬야 한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마치 아이가 나의 대리전을 치르고 있는 듯한 양상, 부모들 사이에서 흐르는 미묘한 긴장과 눈빛 사이에서 반드시 승자와 패자가 나뉘는 지금의 싸움에서는 모두가 행복할 수 없다. 이 싸움에서 이겨 아이의 자존감을 키워준다는 건 산술적으로도 확률이 낮다. ‘대안’이 필요했다. 아이의 자존감을 키워줄 수 있는 확률적으로 높은 대안, 지금의 방식과는 다른 대안. 대안학교의 존재가 비로소 하나의 실감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대안학교는 알아볼수록 어려웠다. 아이 문제를 상담하기 위해 대안학교를 운영한 적이 있는 선배를 만나 내가 얻은 결론은 ‘대안학교도 대안을 찾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었다. 공교육에 대한 대안이라는 것 외에 대안교육이 지니고 있는 공통점은 거의 없어 보였다. 대안학교는 하나로 규정하기 어려울 만큼 종류도 많고, 형태도 각양각색이었다. 삶에 대한 다른 방향을 제시하겠다는 대안학교가 다양한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각 대안학교 역시 무엇이 대안적인 것인지, 주류 지향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답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학교에서 대안적 교육을 하더라도 아이의 삶은 졸업 이후에도 지속된다는 것 역시 문제였다. 교육적 대안이 있다고 해도 삶의 대안을 마련해주지 못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선배의 대안학교는 입시 교육을 한다고 말했다.


나는 대안학교에서 과연 ‘대안’을 찾을 수 있을까? 학교가 제시하는 정답과는 존재론적 차원에서 불화하는 존재를 특별하게 가르치기 위해 대안학교가 필요한 것이라면, 내 아이는 대안학교에 맞는 아이일까? 주류가 되기 위한 경쟁에서 이기고 싶은 아이, 아이가 이기도록 도와줘서 자존감을 높이겠다는 식의 발상을 지닌 나 같은 부모는 대안학교에서 입시 교육을 요구하는 부모처럼 대안교육을 또 다른 종류의 주류가 되기 위한 교육으로 만들어버릴 가능성이 크다. 대안적이지 않은 욕망을 품고 있는 부모와 아이는 대안학교에서 대안적 삶을 배우는 대신, 주류적 삶을 강요하게 되지는 않을까. 솔직히 말하면 나는 아이가 주류적 삶에서 너무 멀리 떨어지는 것도 두려웠다. 시대와 불화하는 욕망을 지닌 아이도 아니지만, 대안학교에서 시대와 불화하는 욕망을 지닐까 봐 두려웠다. 조금은 나보다는 안온하게 살았으면 하는 마음, 그것이 안이한 마음인 줄 알면서도 결국 대안학교를 선뜻 선택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다시 학교로 눈을 돌렸다. 학교는 대안학교에 비하면 획일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모든 아이에게 똑같은 말만 하고, 아이 한 명 한 명의 수준과 취향과 관심은 부모가 스스로 살펴보든지, 전문 기관에 맡겨서 키워줘야 한다. 축구를 좋아하면 축구 학원에, 피아노를 좋아하면 피아노 학원에 보내야 한다. 학교는 아이의 개성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협력보다는 경쟁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시대와 불화하는 욕망을 지니는 것보다는 시대에 순응하기를 바란다. 세상이 그런 것을 바라고, 그래야만 우리 아이가 교육을 마친 후 학교 밖에서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지금의 방식으로는, 즉 아이가 지금은 비록 실패했지만 다음번에는 경쟁에서 이겨 성공하도록 만들고, 학원을 다녀서라도 좋은 성적을 받아 나쁜 자아상을 지니지 않도록 학습지를 풀게 하고, 학원에 보내고, 축구 학원도 다니게 하는 삶에서 벗어나기는 힘들 것 같다. 나와 내 아이는 시대와 불화하는 욕망을 지닌 존재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 시대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서 남들을 이겨 자존감을 얻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의지적으로나마’ 이 시대와 주류 질서에 조금은 맞서고 싶다.

솔직히 지는 것이 싫다
나는 늘 이기는 것에 익숙했고 그래서 자신감도 있는 아이였다. 내가 질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것은 시작도 하지 않았다. 나는 자신감은 있지만 실패를 두려워하는 아이였다. 그런 점에서 자존감이 낮은 아이였다. 카드 게임이나 화투, 컴퓨터 게임은 전혀 하지 않는다. 긍정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 내가 확실히 열세라서 잘할 수 없는 것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마음이 더 크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이다. 지는 것이 싫었기 때문에. 나의 이런 낮은 자존감 문제는 아이가 지는 것에 대해서도 내가 지는 것으로 느끼게 만든 핵심 원인이었다.


철학 공부를 하고서도 한참 후에야 비로소 ‘지는 것’의 가치를 이해하게 됐다. 철학자 김영민은 《동무론》에서 인문학의 사명은 ‘무능의 급진화’라고 했다. 능력 없고, 쓸모없고, 항상 진다는 것이 철학의 진정한 가치라는 것이다. 철학은 그 자체로는 아무 쓸모도 없는 무능한 것이지만, 그 쓸모없음 덕분에 우리가 유용하다고 믿고, 옳다고 믿는 모든 것을 의심해보고 반성하게 만든다. 철학의 유용성은 그 무용함에 있다. 때로는 지는 것이 이기는 것보다 가치 있을 때가 있다.

학교 안에서 대안을 찾을 수는 없을까?
지역 간 교육 격차를 줄이고, 양질의 수업을 위해 섬세하게 설계한 교육과정을 살펴보고, 고군분투하는 교사들을 만나면 문제는 학교교육이 아니라 아이를 다른 또래 아이와 비교하며 조용히 웃던 내 마음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는 학교교육이 최선이란 뜻이 아니라 교육을 왜곡하고 있는 것은 학교 시스템 이상으로 부모인 나 자신이라는 뜻이다. 아이가 이기는 것의 즐거움에 중독되면 아이는 부모의 대리 경쟁의 희생양이 되어 공부 잘하는 아이, 서울대 학생, 의사, 판·검사, 외교관, 회계사 등 몇몇 협소한 자아상만 지닌 채 아이 인격의 전체성은 은폐되고 만다. 그런 점에서 부모와 아이의 자존감을 구분하려는 결단이 대안의 시작이다.


나는 내 아이가 싸움에서 이기는 사람이 아니라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라도 싸울 수 있는 사람’으로 자랐으면 한다. 이겨야 자존감을 키울 수 있다는 생각은 이길 가능성이 없는 싸움은 피하고 싶은 사람이 되게 만들 것이다. 아이의 자존감은 ‘이김’이 아니라, 비록 부조리한 세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 강한 힘을 지닌 이 세상에 대해 희망을 품을 때 생겨나는 것이다. 그래서 대안은 학교나 학교 밖에 있지 않고, 이겨야만 자존감이 생긴다는 믿음을 내려놓는 데 있다.


대안학교가 정말 대안일까? 대안학교가 대안적이려면 우리 자신도 그만큼은 대안적이어야 한다. 지는 것을 승리나 자존감의 수단으로 삼는 것 대신 지는 것 자체로 인정하고, 부모인 우리가 ‘진다는 것’의 가치를 성찰한다면, 말하자면 우리가 조금이라도 대안적이고자 노력한다면 일반 학교도 하나의 ‘대안교육’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지금 대안을 찾는 것이 시급한 상황이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인식하고 있다면 말이다.


오늘따라 아이 얼굴이 까맣고, 내 마음은 그보다 더 까맣게 타버렸다. 침묵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음 주에는 선발전 탈락을 기념하며 왜 이번 축구 대표 선발전에서 떨어졌는지에 대해서가 아닌, 왜 축구 대표가 되기를 그렇게 희망하는지에 대해 조용히 말을 걸어볼 생각이다.

권영민

서울대학교에서 서양철학을 전공하고, 철학을 공부하는 공동체인 ‘철학본색’을 운영하며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숙원하던 음악 공부를 위해 유학길에 오른 아내를 대신해 아들 선재를 키워낸 값진 경험을 육아 일기로 기록했다. 그 기록을 엮어 《철학자 아빠의 인문 육아》라는 책으로 출간했다. 6년 터울로 태어난 둘째 선율이 덕분에 다시 육아 전쟁을 치르고 있지만, 아이 둘이 함께하는 완전한 삶을 만들어보겠다고 매일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