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War of Four

넷이서 하는 전쟁

“왜 그렇게 내 마음을 몰라줘”라는 내게 아내는 ‘진정성의 폭력’에 대해 말했다. 진심은 결국 통한다는 믿음이 부부의 사랑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진심은 통하지 않는다
“결혼하고 20kg 쪘어.” 얼마 전 부부 동반 모임에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나더러 왜 이렇게 살이 많이 쪘냐고 묻길래 애써 웃으며 답했다. 그러자 친구들은 약속이나 한 듯 H를 보며 말했다. “제수씨가 너무 잘해주시나 보네.”


모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자동차 안에서 아내의 기분이 좋지 않음을 감지했다. “당신이 살찐 게 왜 내 탓이야?” H가 물었다. “당신 때문에 살이 쪘다고 한 적 없는데?”라고 답했다. “그게 그 말이잖아. 결혼하고 살쪘다는 거나, 나 때문에 살쪘다는 거나.” 나는 어떻게 내가 한 말을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지 당혹스러웠다. “여보, 나는 그냥 사실 그대로를 말한 거잖아. 결혼하고 살이 쪘으니까. 그럼 거기서 뭐라고 말하냐?” 내 항변에 H의 목소리는 높아졌다. “당신 친구들도 꼭 그렇게밖에 말을 못 해? 네가 결혼하고 살이 쪘다는데 거기서 내가 왜 나와?”


셰익스피어는 어떤 시에서 내가 진실한 사람이 되기만 하면 마치 밤이 낮을 따르는 것처럼 그 누구에게든 거짓되지 않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썼다. 나는 셰익스피어를 떠올리며 숨을 가다듬고 말했다. “여보, 내 친구들이 당신 탓을 하려고 한 말이 아니잖아. 농담 갖고 왜 그래?” 그러자 H는 “네가 많이 먹어서 살이 쪘다고 해야지!”라며 쏘아붙였다. 나도 그만 빈정이 상하고 말았다. 진심은 통하지 않았고, 셰익스피어를 믿은 나 자신이 원망스럽게 느껴졌다. 우리의 다툼은 결국 진정성 때문에 시작된 것이다.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고,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에 대한 서운함.

연애를 못한 이유
고백하자면 나는 연애 기술 같은 건 별로 없는 사람이다. 이른바 ‘밀고 당기기’가 전혀 안 되는 인간이다. 인간관계는 진정성 하나면 충분하지 그런 기술이 왜 필요한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때문일까, 연애는 자주 위기를 겪었다. 사랑하는 마음을 숨길 수 없었고, 숨기고 싶지도 않았으며, 무엇보다 그를 사랑하는 내 진정성을 ‘밀고 당기는 기술’ 같은 얄팍한 처세술로 훼손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때에 따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했지만, 치고 빠져야 하는 시점을 포착하는 감각이 내겐 없었다. 그런 이유로 몇 번을 차이고, 다시 만나길 거듭한 후 우여곡절 끝에 결혼을 했다.


결혼 후에도 비슷한 문제는 반복됐다. 오해받는 것을 못 견디는 성격 탓에 갈등이 있을 때마다 내 진정성을 강조했다. “내 마음이 그런 게 아닌 걸 알면서 말 한마디 가지고 도대체 왜 그래?” “부모님께서 그런 뜻으로 하신 말이 아닌 걸 잘 알잖아?” 그럴 때마다 H는 네가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면 내가 다 이해해야 하는 거냐고 되물었다. 이어서 “당신의 진정성만 생각하지 말고 내 상황과 기분도 이해해야지!” 하고 쏘아붙이곤 했다. 그리고 한마디를 더 보탰다. “그렇게 센스가 없으니 연애도 못하지.”


사실 아이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빠가 오늘 혼냈지만,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거야”라고 하면 H는 “실컷 혼내놓고 사랑한다고 하면 그걸 아이가 이해해? 사랑이 혼내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라며 나의 행동을 ‘진정성의 폭력’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진심 여부와는 상관이 없다고 덧붙였다.

넷이 얽힌 싸움
집에 도착한 후 H는 씻지도 않은 채 곧장 침대에 누웠다. 화가 난 그녀 곁으로 가기 머쓱해진 나는 잠든 아이 곁에 누웠다. 잠이 오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일에 대해 생각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생각해봐도 H의 기분이 상한 이유가 이해되지 않았다.


결혼 후에 정말 살이 쪘다. 결혼한 후 H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노력했다. 맛집을 찾아다니며 맛있는 음식을 먹고, 카페에서 달콤한 디저트를 먹는 데이트를 했다. 그러는 사이 친구들이 줄었고, 주말 운동 모임도 나가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살이 쪘다. 어디까지나 내 선택이었지만 H를 위한 선택이기도 했다. H를 위해 함께 더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운동을 하지 않기로 선택한 거니까. “결혼하고 20kg 쪘어”라는 말을 풀어보면 ‘그녀를 위해 한 나의 선택이 살찐 이유’가 된다. 그래서 내가 살이 찐 이유로 든 ‘결혼 후’를 H는 ‘나 때문’으로 이해했고, 나는 ‘나의 선택 때문’이라고 이해한 것이 해석이 달라진 이유였다.


살이 찌고, 고혈압과 당뇨가 생긴 건 내 선택 때문이라고 말해도 H는 그 ‘내 선택’에 자신의 책임이 있다고 느꼈다. 이런 생각에 이르러서야 나는 부부 관계가 무엇인지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부부가 되면 ‘나만의 방’에서 내릴 수 있는 결정이란 없다. 모든 것이 배우자와 어느 정도 엮여 있고, 그에 따른 책임도 함께 지게 된다. 그 연대책임을 친구들은 H에게 있다고 해석했고, 나는 내게 있다고 말했으며, H는 내가 한 말로 친구들이 그런 식으로 해석해서 자신이 무책임한 사람이 되어버린 데 화가 난 것이다.


그날 격한 싸움을 벌인 자동차 안에는 나와 H 두 사람이 아니라, 네 명이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H가 생각하는 H’가 기본이다. 그리고 ‘H가 생각하는 나’, ‘내가 생각하는 H’도 있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H가 생각하는 나’는 같은 경우도 있지만 다를 때도 많다. 이 괴리를 생각하지 못하면 오해, 불신,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내가 살찐 것은 어디까지나 ‘내 탓이라고 생각하는 나’가 있다. 또 H가 생각하는 ‘배우자에게 책임을 돌리는 무책임한 남편인 나’가 있다. 나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이 엉켜서 오해를 만들고 싸움으로 발전했다.


업무로 만난 관계는 내가 생각하는 나와 상대가 생각하는 나 사이의 거리가 적다. 이에 비해 부부 관계는 서로에 대해 명확하지 않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상대가 생각하는 ‘나’의 거리가 크고, 그래서 진심이 잘 통하지 않는다. 진정성은 ‘내가 생각하는 나’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상대가 생각하는 나’를 무시하기 쉽다. 그리고 이 차이가 나를, 그리고 H를 화나게 만든다. 우리는 상대를 내가 멋대로 만든 ‘이미지’에 끼워 맞춰온 것은 아닐까. 사랑은 서로에 대한 환상을 낳고, 그 환상은 결혼을 낳고, 환상이 걷히지 않은 결혼 생활은 갈등을 낳는다.

사필귀정?
“진정성 하나면 충분하다”, “진심은 결국 통한다”, “사필귀정”. 갈등이 있을 때면 떠올려보는 말들이지만, 그건 직장 동료 사이나 친구 사이에는 통할지 몰라도, 부부 사이에서는 게으르거나 이기적인 말일 뿐이다.


진심은 자주 오해받고, 오해는 쉽게 풀리지 않는다. 자식에게 ‘자존감’을 키워주어야 한다는 믿음이 교육을 왜곡시키듯, 진정성에 대한 믿음이 부부 관계를 힘들게 만든다. 진정성이란 이름으로 ‘나 자신에 대한 나’의 생각을 배우자에게 강요하면 그건 폭력이 된다. 어쩌면 결혼 생활이란 내가 그동안 상대에 대해 내려온 수많은 판단을 조금씩 포기하고 해체하는 과정, 상대가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을 수용하는 과정, 내가 생각하는 자신을 상대에게 끊임없이 설득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진심이나 진정성 말고도 많은 것이 필요하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결코 모든 것이 올바르게 마무리되지 않는다. 거기에는 포기, 수용, 해체, 설득 등 많은 조건이 따라붙는다.


몇 시간 후, H가 누워 있는 침대로 가 곁에 누웠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여보, 미안해.” H는 깨어 있었다. “철학 공부한다는 사람이 말이 왜 그렇게 두루뭉술하냐? 앞으로는 ‘결혼하고 내가 자기 관리를 못 해서 20kg 쪘다’고 말해”라고 철학자처럼 정확하게 말하는 방법을 내게 가르쳐줬다. 비로소 긴장이 풀렸다.

파트너로 부르는 이유
나는 H를 ‘파트너’로 소개한다. 지면에도 그렇게 쓰니 왜 아내를 ‘파트너’로 부르는지 의아하다는 반응이 많았다. 철학 공부하는 사람답게 더 정확히 말해보자면, H와 나는 연기 파트너다. 나는 되도록 ‘내가 생각하는 나’만이 아니라 ‘H가 생각하는 나’로 연기하기 위해 노력한다. 나에 대한 H의 기대와 이미지에 맞춰, H가 내게 기대하는 역할과 방식을 참조해 연기한다. 물론 그건 진짜 내가 아니고 내가 바라는 모습이 아닐 때도 있다. 그러나 하고 싶지 않은 말을 하고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할 때, 나는 나와 상대가 가진 기대의 차이에서 오는 분열을 느끼고, 그 분열을 내가 선택했다는 사실에서 내가 지금도 여전히 아내를 강렬하게 사랑하고 있음을 느낀다.


물론 H 역시 끊임없이 연기를 하고 있다. H가 내 기분과 상황에 맞추려 연기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고마움과 사랑을 느낀다. 무엇보다 그녀가 그런 연기를 해야 하는 상황을 만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나 역시 연기한다. 결혼 초 어색한 연기로 혼나기 일쑤이던 나는 어디까지가 ‘연기한 나’인지, ‘실제의 나’인지 구분이 모호해지는 경력 10년 차 연기자가 되었다. 진정성이란 무엇일까? 셰익스피어의 말처럼 ‘나에 대한 진정성’은 나 자신에게 정직한 것에서 비롯한 것이겠지만, ‘부부 관계에서의 진정성’은 자기기만 같은 연기로서 나 자신에 대한 진정성까지 포기할 수 있을 때 생겨나는 것이다.


철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사랑을 두고 “매일 배워나가는 것”이고 “매일 창조하고 끊임없이 조정하는 노동”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사랑은 의지가 있는 두 주체의 만남이기에 항상 어떤 종류든 갈등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랑한다면 그러한 갈등에도 밀고 당기고 조정하며 관계를 지속해나간다. 우리의 고된 연기는 우리만의 조정 방식인 셈이다. 나는 결혼하고 10년이 지나서야 부부 관계의 진정성은 밀고 당기기의 모순에서 비롯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부부 관계는 상대의 손을 너무 꽉 잡아도, 놓칠 만큼 가볍게만 잡아서도 안 된다. 어느 정도 포기해야 하기에 협상과 비슷하고, 결코 손에 거머쥘 수 없는 것을 쥐려 한다는 점에서 애무와 비슷하며, 끝도 없고 완성도 없다는 점에서 사랑과 비슷하다. 정말이지 내 사랑은, 내 연기는 노동이라 고되기 짝이 없다.

키스를 위한 노동
배우자든, 자녀든 그것이 누구든 간에 ‘매일 창조하고, 끊임없이 조정하는 노동’을 생략한다면 우리는 그 누군가를 의지가 있는 인간이 아니라, 적당히 관리하고 관리받는 대상으로 여기는 걸지도 모른다. 부부란 복잡한 것이라 한 번의 키스를 위해 서로 말고 당기고, 협상하고, 다투고, 포기하는 온갖 노력 속에서 계속 배워야만 하는 관계다. 그런 점에서 가족끼리라면 몰라도 부부끼리라면 키스를 위한 노동이 필요하다. 사랑은, 결혼은, 부부는 스스로 절대 완성되지 않는다. 내 진정성이라는 이름으로 상대의 의지를 무시한 건 아닌가, 진심이라는 이름으로 내 마음을 상대에게 강요하려 한 건 아닌가, 사필귀정에 대한 믿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노력을 게을리한 건 아닌가. ‘사랑’이 ‘관리’로 타락하는 것도 바로 그 순간이다.


다음 모임 자리에서 “왜 이렇게 살이 쪘냐?”고 또 어떤 친구 놈이 묻는다면 이번엔 이렇게 말할 생각이다. “결혼하고 20kg 쪘어. 맛있는 밥 먹고 운동 안 하면 살찌는 게 당연하지.” 그러고는 좀 더 연기 실력을 더해 이런 말도 보탤 거다. “H가 다이어트하라고 많이 도와주는데도 잘 안 돼. 내가 의지가 좀 약한가 봐.” 어쩌면 친구들은 H에게 “제수씨가 관리 좀 더 해주셔야겠네” 라며 시답잖은 소리를 덧붙일지 모른다. 그러면 나는 친구들의 웃음이 잦아 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H를 사랑하니까 꼭 빼야지”라고 친구들이라면 가족에게는 결코 하지 않을 말을 H에게 할 거다. 지금 곁에서 글 쓰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H가 말한다. 다음 모임 전에 살을 빼는 게 사랑이라고. 다시 말하지만, 내 사랑은 노동이라 고되다.

권영민

서울대학교에서 서양철학을 전공하고, 철학을 공부하는 공동체인 ‘철학본색’을 운영하며 강의를 하고 있다. 숙원하던 음악 공부를 위해 유학길에 오른 아내 대신 아들 선재를 키워낸 값진 경험을 육아 일기로 기록했다. 그 기록을 엮어 《철학자 아빠의 인문 육아》라는 책으로 출간했다. 6년 터울로 태어난 둘째 선율이 덕분에 다시 육아 전쟁을 치르고 있지만, 아이 둘이 함께하는 완전한 삶을 만들어보겠다고 매일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