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Crisis in the Marriage System

결혼 제도 안에서 위기를 만났을 때

위기와 갈등을 겪는 3040 부부의 솔직한 고백.
휴혼, 이혼이라는 두 가지 선택.

Part 1 - 지금 휴혼 중입니다

헤어지지 않기 위해 ‘휴혼’을 선택한 박시현. 그는 휴혼을 부부가 각자 떨어져 지내며 아내와 남편으로서의 의무에서 벗어나고, 서로의 가치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기간이라고 정의한다.

우리 잠시 헤어지자
휴혼을 먼저 제안한 건 남편이었다. “우리는 이혼을 해야 해”라는 말만 반복하던 그와 설전을 벌인 지 한 달, 결국 나도 이혼에 합의하게 되었다. 그렇게 이별이 현실이 되려고 할 때 이번에는 남편이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롤러코스터 같은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우리만의 합의점을 찾은 게 바로 휴혼이다. 아이가 있으니 유예기간을 가져보자는 거였다. 별거가 이혼의 전 단계라면 휴혼은 재결합의 전 단계라고 생각했다. 어떤 교류도 없는 별거와 달리 휴혼은 계속 연락하면서 지내기 때문이다. 몇 가지 규칙도 있었다. 부부로서의 생각을 각자 자리에서 해보기, 엄마 아빠로서의 역할은 이어가기, 이성 문제는 만들지 않기 등. 일종의 부부 사이 ‘갭 이어(gap year)’였다.

우리의 갈등은 내 역할에 대한 남편의 높은 기대치에서 시작했다. 남편은 시어머니가 본인에게 해주던 만큼 내가 집안일을 충실하게 이행하기를 바랐고, 나는 우리 어머니가 하던 대로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며 넘기는 편이었다. 게다가 남편은 살림과 육아에 나보다 훨씬 능숙해서 더욱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내가 모든 역할을 내팽개친 것도 아닌데, 그의 기준은 여전히 높아 보였다. 어느 날부터는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집에 있다가도 현관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만 들리면 잘못한 것도 없이 긴장이 됐고 모든 신경이 남편에게 향했다. 이 굴레를 끊기 위해서라도 우리에게 휴식기가 필요했다.

휴혼을 하면서 가장 걱정된 것은 우리가 결국 헤어질지 모른다는 불안이 아닌 바로 나의 생존이었다. ‘정말 내가 다시 혼자 살 수 있을까?’, ‘안정적인 수입을 이어갈 수 있을까?’ 등 지난 5년 동안 생각해본 적 없던 두려움을 직면하면서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해야 했다. 먼저 보금자리를 위한 원룸을 찾아다녔다. 보증금 100만 원에 월세 28만 원. 나에게 허락된 유일한 공간이었다. 그리고 대학 동기가 창업한 스타트업에 합류했다. 돌이켜보면 당시 가장 큰 문제는 그동안 남편에게 의존하면서 나에 대한 믿음이 많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결혼 생활을 거치다 보니 박시현이라는 존재에 대한 신뢰가 많이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위기는 결국 기회다. 휴혼으로 다시 사회생활의 기회를 얻었고, 나는 내 인생을 주체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다는 굳건한 믿음이 생겼다.

휴혼을 바라보는 아이
처음에는 아이에 대한 걱정이 나를 따라다녔다. 대부분의 부부가 이혼이나 별거를 망설이는 이유 중 하나가 아이 때문이다. 우리도 그랬다. 혹여 우리의 선택이 아이에게 정서적으로 부정적 영향을 미치진 않을까 두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린이집에서 연락이 왔다. 엄마의 독립과 함께 부부 갈등이 눈앞에서 사라지니까 아이가 정서적으로 안정을 찾은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이가 정서적 불안의 바닥을 찍은 것은 우리가 헤어진 뒤가 아니라, 오히려 그 직전에 싸움이 한창 잦을 때였다. 순하던 아이가 어린이집 친구들을 밀치고 상처를 낸 이야기가 들려오던 시기이기도 했다. 엄마 아빠가 따로 지내며 점점 관계를 회복하니 아이도 그에 따라 안정기에 진입한 것 같았다. 아이는 부모의 관계를 따라온다.

나의 빈자리는 시부모님이 채워주셨고 아이는 할머니·할아버지의 사랑을 충분히 받았다. 이 또한 남편의 선택이었다. 아이는 아는지 모르는지, 휴혼 과정에서 엄마 집, 아빠 집이라며 해맑게 신나 했다. 가족 중 엄마가 어느 날 쏙 사라진 상황이었다면 물론 불안해했겠지만 나의 주말은 오롯이 아이만을 위한 시간이었고, 또 우리 부부는 계속해서 연락을 이어갔으니 아이의 시점에서는 다행히 둘의 거처만 다르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누군가는 엄마 아빠가 아이를 위해 무조건 같이 살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어른의 생각일 뿐, 어떤 면에서는 몹시 폭력적인 말처럼 비친다. 이 갈등을 고스란히 아이에게 노출시키지만, 그렇다고 위기가 쉽게 사그라들 기세가 보이진 않는다면 소용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슬아슬한 얼음 위로 세 식구가 간신히 지나가는 것보다 서로 떨어져 안전한 길로 걸어가는 게 더 나을 때가 있다.

완벽주의자로 나에게 강도 높은 엄마 역할을 원하던 남편은 자기만의 시간을 지내며 어느 날 문득 나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엄마는 특정한 상이 있는 게 아니고, 아이 옆에 있는 그 존재만으로도 엄마라는 사실을 깨우쳤다면서 말이다. 휴혼으로 우리 가족에게 일어난 수많은 변화 중 하나는 엄마 아빠 자리의 무게를 서로 이해하게 된 것이었다. 휴혼 전에는 전혀 상상할 수 없던 아주 큰 수확이었다. 나 또한 남편과 거리를 두고 남편 입장으로 생각해볼 수 있었다. 우리 두 부부가 얼마나 서로가 원하는 것만 요구했는지 깨달아가는 동안 휴혼의 끝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1년 3개월 만이었다.

휴혼 최종 점검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다시 같이 살기로 했다. 남편이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것만으로 경직되고 눈치가 보이던 나는 이제 매일 저녁 그의 퇴근 시간을 묻는다. 일찍 와서 나와 놀자고 재촉하는 내 모습을 보며, 우리의 관계가 얼마나 많이 개선되었는지를 새삼 느낀다. 이 시간으로 우리는 헤어지지 않을 거라는 단단한 믿음이 생겼고, 여생의 동반자가 되었다는 확신이 든다. 이제는 남편과 노는 시간이 제일 재미있다.

물론 휴혼을 마친 지금도 우리는 계속해서 싸운다. 다만 우리의 리셋된 경험이 감정적 분노를 억제하고, 차분하게 대화할 수 있도록 계속 도와준다. 그전에는 감정이 다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싸우기를 반복했다면, 지금은 정말 필요한 싸움만 이어가고 있다. 말꼬리를 잡거나 과거를 들추거나 상처를 꼬집는 일은 누구도 하지 않는다.

남편의 십팔번은 “그럼 헤어져”였다. 관계를 끊거나 도망치는 것은 갈등을 외면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혹여 내가 장난으로라도 그런 말을 꺼내면 절대 하지 말라며 단호하게 답한다. 우리의 이야기를 담은 책 《나는 지금 휴혼 중입니다》를 주변 사람들에게도 선물을 많이 했다더니 정말 많이 변했다.

남편과 나는 따로 산 경험이 있는 부부가 됐다. 서로 개인적 시간을 갖고 자신을 돌아본 이 기간이 다시 하나가 될 수 있는 자양분이 된 셈이다. 그래서 아이가 성인으로 자라 스무 살이 될 즈음에 우리는 휴혼을 한 번 더 하기로 했다. 이제는 부부도 자기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경험으로써 잘 안다. 시작은 부부 갈등 때문이었지만 이건 그저 짧은 결혼 방학일 뿐이다. 더 멀리 가기 위해,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나무 그늘 밑에서 한 번씩 쉬는 것처럼. 그래서 나는 휴혼을 많은 사람에게 권한다. 위기의 부부가 아니어도 좋다. 열심히 달려온 두 부부가 잠시 따로 떨어져 지내는 게 부부 관계에 얼마나 큰 디딤판이 되는지 곧 알게 될 것이다.

박시현

브런치에 연재한 글을 《나는 지금 휴혼 중입니다》라는 책으로 발간한 후 휴혼의 의미를 전파하고 있다. 결혼 생활에 쉼표를 찍으면서 자생력을 키워가고 있으며, 창직에 관한 책 《내 직업은 내가 만든다》를 썼고, 그에 관한 강연도 이어간다.

Part 2 - 우리를 위한 선택

아내와는 다시 웃으며 연락할 수 있는 사이가 되었지만 그 기억은 여전히 아프다. 이혼 2년 차 박종범은 딸을 위한 선물을 고를 때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다.

우리 헤어지자
이혼을 먼저 제안한 건 아내였다. 한국을 떠나 캐나디안인 아내의 고향에서 지내는 동안 내 마음은 마치 추를 단 듯 무거웠다. 이방인으로서의 생활이 점점 어려워졌고, 타국에 적응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그때 나는 몇 번의 도망을 시도했다. 공항까지 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거나, 편지를 써놓고 그대로 나가버리거나.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갈망이 점점 커질 즈음, 나는 무작정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가지 말라며 울던 아내를 뿌리치고 그렇게 한국으로 향했다.

‘일시적 적응 장애’, 당시 내가 진단받은 증상의 이름이었다. 흔히 알고 있는 일종의 향수병 같은 거였다. 내가 왜 그때 그렇게 힘들었는지 알면서 그제야 캐나다에서 보낸 시간들이 떠올랐다. 아내의 슬퍼하는 모습, 떠나는 나를 보며 “아빠 바이바이” 를 말했다는 해맑은 딸의 얼굴. 긴 시간이 지나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이 응어리는 여전히 내 마음 한쪽에 남아 있다. 한창 한국에서 상담 치료를 받으며 아내와 다시 잘 해보려고 하던 즈음, 어느 날 아내가 말했다. 힘들어서 더 이상 이 관계를 이어갈 자신이 없다는 내용이었다. 이혼 이야기가 우리 사이에 등장하고 나서 나는 아내의 마음을 돌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곧바로 캐나다로 향했다. 하지만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아내는 완고했다. 그제야 알았다. 그녀가 이혼을 정말 원한다는 사실을. 나는 우리의 이혼을 받아들이기 어렵고 고통스러웠다. 내게는 선택권이 없었지만, 그렇게 우리는 이혼하게 되었다.

이따금 “요즘 세상에 이혼이 별거야?” 하는 이도 있지만, 이혼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이혼은 그렇게 가볍게 이야기할 수 있는 소재가 아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두고 크게 남아 있는 트라우마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혼 이후에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전혀 변하지 않은 것은 우리가 매일같이 연락을 하며 지낸다는 것이다. 헤어진 것은 나와 아내일 뿐, 나는 여전히 딸의 아빠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거의 매일 영상통화를 한다. 아내를 비롯해 처가댁 식구들도 모두 그걸 원했고, 아빠라는 존재가 딸에게서 사라지는 것을 나도 바라지 않았다. 우리의 이혼은 칼로 무 자르듯 단숨에 벌어진 게 아니라 결론에 이르기까지 그러데이션 같은 점진적 변화가 있었으니 그동안 딸에게 충격이 덜 가게끔 하고 싶었다. 그렇게 우리는 매일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일상처럼 연락을 건넨다.

이혼 뒤의 터널
지금까지도 트라우마로 남아 있지만 이혼 직후에는 긴 우울의 터널이 나를 찾아왔다. 아주 길고 거대한 고통. 솔직히 말하면 이혼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도 지난날 내가 어떤 감정이었고, 사건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오로지 드문드문 단편적 장면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이를테면 시도 때도 없이 북받쳐 혼자 꺼이꺼이 울거나, 갑자기 멍해져 있던 모습들처럼 말이다. 망각은 인간의 축복이라는 어떤 이의 말은 저도 모르게 기억하고 싶은 것을 머릿속에서 제거해주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나마 살 수 있도록.

이 고통은 아주 괴롭다. 연애 후의 헤어짐이나 이별과는 전혀 다른 종류이고, 연인 관계와 비교할 수 없는 크기의 것이다. 우리 사이에는 자식도 있으니, 마치 가족을 잃은 듯한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실감이 밀려드는 것이다. 이걸 이겨낼 수 있던 것은 오로지 시간의 몫이었다. “시간이 약”이라는 오래된 말의 진의를 그때 깨달았다. 무엇보다 우리가 헤어져 지내는 시간이 만든 거리만큼, 나는 아내와 있었던 서운함을 모두 잊을 수 있었다. 이혼 과정에서 서로가 양보하고 헌신한 것들이 온전히 느껴지면서 우리 사이가 그렇게 나쁘진 않았구나 생각했다.

터널은 최근 3~4개월 즈음부터 나아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친구들과 스케이트보드도 타러 가고, 다른 사람도 만난다. 연애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성을 만나기도 한다. 터널을 지나던 시기의 내 모습은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었다. 삶의 의욕도, 재미도, 성욕도 없었다. 모든 면에서 무기력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진심으로 말할 수 있는데, 이제 나는 몹시 행복하다.

정서적 안정과 자유로운 행복으로 나의 안위를 보듬게 되지만, 그럼에도 이혼을 고민하는 사람에게는 최대한 이혼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괜히 감정적 문제 때문에 건너지 않아도 되는 강을 건너는 것은 멍청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나도 그랬다. 경험으로 비추어보건대 이혼함으로써 건강해질 수 있는 관계는 없어 보인다. 물론 나도 이제야 행복을 말하지만, 그걸 감수하기엔 고통이 무지막지하게 크다. 굳이 겪지 않아도 되는 이 터널은 안 건너는 게 좋을 것이다. 최대한 이혼과 죽음은 미루어야 한다.

아빠라는 영원한 이름
딸은 지금 만 네 살이다. 이혼할 당시에는 세 살이었는데, 엄마 아빠의 부재를 인식하는 정도만 되고 이혼의 의미를 정확히 아는 건 아니다. 그래도 혹여 이 일로 상처받지는 않을까 걱정되어 최대한 캐나다에 자주 가려고 한다. 1년에 최소 두 번, 많게는 네다섯 번까지, 그리고 가족과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실은 아내와 같이 있을 때 별로 행복하지는 않다. 끊임없는 잔소리를 듣다 보면 이제 내 아내가 아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싶기까지 하다. 물론 아내라고 나와 함께 있고 싶을까? 다만 우리가 영원히 아이의 엄마 아빠라는 점을 생각하면서, 아이에게 행복한 기억을 만들어주기 위해 서로 참고 양보하는 것이다. 사람은 행복한 기억을 곱씹으며 살아가기 때문에 부모는 아이의 행복한 유년기를 책임질 의무가 있다.

한국에서 작업하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양육비를 보내기 위해 은행에 갈 때다. 그게 내가 돈을 버는 가장 큰 이유이니까. 캐나다의 경우 양육비를 법원에서 책정해준다. 당시 나는 아내에게 혹시 그 금액이 생각한 것보다 적다면 더 보내줄 테니 말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법원에서는 내가 원래 보내던 양육비의 절반을 책정했고, 나는 보내던 대로 보내주고 있다. 나는 본래 쇼핑을 좋아하거나 무언가를 사면서 행복해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하지만 유일하게 소비가 기쁠 때는 아이의 선물을 살 때, 캐나다행 비행기표를 예매할 때, 그리고 양육비를 환전해서 보낼 때다. 딸 선물을 살 때에는 무조건 제일 좋은 걸 달라고 한다. 가격도 안 보고.

일을 하는 자세도 많이 달라졌다. 전에는 포토그래퍼로서 커리어가 중요하니까 내가 개인적으로 주어진 일을 선별했지만, 지금은 돈만 주면 다 한다는 말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입에 달고 산다. 그래야 캐나다에 한 번이라도 더 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책임감과 삶의 목적도 많이 변했다. 이전에는 사진이 제일 중요했다면 이제는 그 어떤 것도 우위할 수 없는 최고의 가치가 생긴 것이다. 다음에는 아이를 위해 웹툰 작업을 해보고 싶다. 나는 기억하지만 아이는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의 모습을 전해주고 싶은 마음에서다. 말로 구구절절 설명하기보다 그림이 더 이해하기 쉽지 않을까? 어떻게 엄마를 만났는지, 어떻게 캐나다에 갔는지, 내가 어떤 힘든 시간을 보냈는지, 우리 부부가 어떻게 이혼했는지 그리고 그 와중에도 널 얼마나 사랑했는지....

박종범

사진으로 세상을 기록하는 포토그래퍼이자, 멋진 것만 하며 살고 싶은 사나이. 다양한 매체와 함께 협업 작업을 하고 있다. 토요일에는 오랜 동네 친구들과 그의 아이들을 데리고 스케이트를 타고, 계절마다 사랑하는 딸을 만나러 캐나다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