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 I Really Need a House?

나는 정말 집이 필요한 걸까?

집을 꼭 사야 할까, 고민하면서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고민이다.

나는 부산에서 나고 자랐다. 1978년생인 내가 성장할 때의 부산은, 아니 한국은 고도성장기의 단꿈에 취해 있었다. 나는 풍족하진 않았지만, 궁핍도 겪지 않고 컸다. 운동권의 그늘에서 사회적 사색에 취한 것도 아니었다. 서태지나 왕가위의 등장 정도가 우리 세대의 가장 혁명적 일이 아니었을까. 아, IMF 외환 위기가 있었다. 우리의 아버지들이 거리로 내몰리고, 친척들의 부동산이 폭락을 거듭한 때. 당시 우리 집도 IMF 외환 위기의 태풍을 정면으로 맞았다. 이런저런 사업을 벌이던 아버지는 몇몇 부동산을 담보로 빌린 대출 때문에 크게 휘청였고, 한동안 집안 분위기는 물에 젖은 휴지처럼 침울했다(어떻게든 버텼다면 지금쯤 얘기가 달라졌겠지만, 그러지 못 했다).그 사연을 다 풀자면 눈물이 날 것 같아 여기까지만. 다만 그건 내 인생 최초의 트라우마가 되었다. 부동산과 대출은 절대 손대서는 안 되는 금단의 물건이었다.
이후 나는 잡지 에디터가 되었고, 최근까지 그 일을 하면서 살았다. 결혼하기 전의 거처는 혜화동이었는데 조용하고, 따뜻한 동네였다. 건물이 낮아 하늘을 보기가 쉬웠고, 뒤로는 전통의 부촌인 성북동이, 앞으로는 젊음으로 들썩이는 대학로가 있었다. 무엇보다 초 단위로 바뀌는 서울의 시간대에서 살짝 벗어난 듯한, 한가한 기운이 좋았다.
혜화동에서 전세로 살던 빌라는 20여 평이었다. 30대 초반인 남자 혼자 살기엔 사실 꽤 넓은 집이긴 했다. 그 집에 살면서 몇 번의 연애를 했고,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했고, 아이까지 가졌다. 신혼 때만 해도 큰 불편함 없던 집은 아이가 생기면서 달라졌다. 사실 20평이라는 면적은 꽤 애매하다. 둘이 살기에는 넉넉한데 셋이 살기엔 불편하다. 아이 있는 집이 어딘들 번잡하지 않겠느냐만, 그래도 상대적으로 짐이 많은 우리 부부에겐 좀 더 큰 집이 필요했다. 하지만 같은 동네에서 비슷한 예산으로 집을 넓히는 데는 무리가 있었다. 아내는 대출을 받아 집을 사자고 했지만, 그것만은 싫었다. 대출로 부동산을 구입한다는 것에 대한 트라우마가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다. 한번 대출의 세계에 발을 들이면 빚이라는 뱀이 내 몸을 으스러지게 조일 것만 같았다.

고민한 끝에 우리는 인천으로 떠났다. 인천은 아내의 고향이었고, 장인과 장모도 터를 잡고 있었다. 맞벌이 부부 입장에서 인천으로 떠나면 당장 몸이야 고달프겠지만 아이를 처가 어른들께 맡길 수 있었다. 인천에 있는 처가 인근의 아파트를 구하려 한 게 2012년경이었다.
인천은 서울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해서 아파트를 구매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 나를 막아선 건 인터넷상에서 스물스물 피어오르던 부동산 폭락론이었다. 일부 경제학자들은 한국의 경제 규모에 비해 부동산 가격이 너무 비싸며, 곧 하락할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을 강하게 펼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비관은 낙관보다 쉽다. 부정적 의견에 더 쉽게 마음이 간다. 아파트를 사기 위해서는 가진 현금을 모조리 털어넣어야 하는 상황에서, 배포 작은 나는 보수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집주인들도 그들 나름대로 발등에 붙은 불이었다. 부동산 시장이 하락세로 전활될 수 있다는 공포 앞에서 그들 역시 보수적 선택을 했고, 그 결과가 월세전환이었다.내가 거주하던 아파트는 3000세대가 사는 대규모 단지였지만, 그 거대한 단지 내에서도 전세를 찾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우리는 결국 반전세 아파트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 내보는 월세였다. 적지 않은 현금이 매달 빠져나가는 건 괴로운 일이었지만 선택지가 없었다.

인천에서의 삶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인천 집에 도착하면 서울과 완전히 격리된다는 점에서 일종의 긍정적 소외감도 느꼈고, 아이를 맘 놓고 맡길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었다. 하지만 인천에서 강남 신사동까지 움직여야 하는 출퇴근 시간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길고 길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해도, 자동차를 이용해도 편도가 기본 1시간 40분은 걸렸다. 출퇴근 시간을 합하면 왕복 3~4시간을 거리에서 허비해야 한다는 건 상상 이상으로 괴로운 일이었다.
얼마 전 한 신문에는 “출퇴근 시간이 길수록 행복지수가 떨어지고 삶의 만족도도 떨어진다”는 요지의 기사가 등장했다. OECD 국가 중 출퇴근 시간이 가장 긴 국가는 한국이며, 그로 인해 한국인 전반의 삶의 질이 나빠진다는 내용이었다. 정말이었다. 매일 장거리를 이동하면 마음도 지치고 몸도 지친다. 술이라도 한잔할라치면 대리운전비만 4만 원이었다. 아이의 양육 문제가 아니었다면 진작에 서울로 나왔겠지만, 맘 놓고 아이를 맡길 방법도 마땅찮았다. 그렇게 인천에서 4년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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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어느 정도 컸고, 더 이상 출퇴근의 피로를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하던 지난 여름, 나는 다시 상경을 결심했다. 점찍은 곳은 성동구였다. 직장이 있는 강남에 비해 가격은 저렴하면서도 강남과 지리적으로 멀지 않은 곳. 하지만 집값은 4년전에 비해 최소1~2억원 이상 상승해 있었다. 이상하기도 하지. 내가 의지했던 경제학자들의 예상대로라면 지금쯤 부동산 가격이 많이 하락해 있어야 하는데, 가계 부채가 1000조 원을 넘었다는데, 아파트 가격은 하락은커녕 더 올라 있었다. 차라리 4년 전 그때, 아내 말을 따라 무리해서라도 대출을 받아 집을 샀다면 불로소득을 얻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얄팍한 상실감에 입맛이 썼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대출을 받아 집을 사기에는 또 고민이었다. 다시 한번, 비관이 낙관보다 쉬웠다. 지금이 부동산 가격의 고점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나는 다시 한번 대출로 집을 살 생각을 접었다. ‘더 오를 수도 있다’는 기대보다 ‘여기서 내려가면 어떡하지’에 대한 공포가 더 컸다. 얼마 안 되는 이 종잣돈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는 절박감 같은 것. 우리는 결국 성동구의 한 아파트에 전세로 정착했다. 1년 전 일이다.

부동산 폭락론이 슬그머니 자취를 감춘 지금은 또 다른 소리가 들린다. 서울은 다른 대도시에 비해 여전히 부동산 가격이 저평가돼 있다거나, 수도권은 위험해도 서울 도심은 괜찮다거나,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연착륙을 시도할 거라거나. 부동산에 관한 한 계속 누군가의 말에 휘둘려온 나는 또 마음이 엇갈린다. 물론 이런 생각으로 시간을 보내는 사이, 내가 사는 아파트만 해도 몇 달 새 수천 만원이 올랐다. 부동산이라는 제로섬 게임에서 나는 계속 패배하기만 했다. 아내는 여전히 계속 집을 사고 싶어 한다. ‘내 집’이라는 안정감이 늘 너무 좋다고.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아내에게 이렇게 되묻는다.
“지금 사는 곳이 내 집이지, 꼭 계약서가 내 이름으로 돼 있어야만 내 집인가?” “대출받아 사면 그게 은행 집이지 우리 집인가?” “때마다 이사 다니는 것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일이야. 한 동네에서만 수십 년 동안 살아야 한다는 건 너무 지겨운 일 아닐까?” “막상 집을 산다 해도 대출금 이자와 원금 상환까지 겹치면 그 금액이 우리 삶을 짓이겨놓진 않을까? 차라리 지금이 더 속 편한 건 아닐까?” 아내는 나를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지만, 대출까지 받으면서 꼭 집을 사야만 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현재 서울시 평균 아파트값은 6억 원에 달한다는 보도를 봤다. 여전히 월급쟁이들이 돈을 모아 사기에는 너무 비싼 금액이다. 지금 사는 아파트도 1년 뒤쯤 재계약을 해야 한다.이꼬여있는 시장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여전히 모르겠다. 지금도 모르지만 1년 뒤에도 모를 것이다. 다만 또 집을 살지 말지를 결정해야 할 때 쯤엔 곧 초등학교에 입학할 아이에게 물어보려 한다. “이 집이 좋아? 계속 살고 싶어?” 물었을 때 아이가 좋다면 아이의 의견에 따르려고 한다. 어차피 어떻게 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시장이라면 그게 속이라도 편할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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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원

<아레나 옴므 플러스>, <젠틀맨>, <헤렌>, <노블레스 맨> 에서 에디터로 일했다. 지금은 잡지를 떠나 모 기업의 디지털 콘텐츠를 만든다.뭐 좀 재밌는 거 없나 싶어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자주 낙담하곤 한다. 글로 밥벌이를 했지만, 마지막 꿈은 배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