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eaming of a Happy Ending with My Father

아버지와 해피엔딩을 꿈꾸며

아버지를 인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내가 만든 아버지 역할을 강요하지 않기로 했다.

부재하는 아버지, 권위적 아버지
아이와 함께 《헨젤과 그레텔》을 읽다가 곤혹스러운 질문을 받았다. “아빠, 어떻게 헨젤 아빠가 헨젤과 그레텔을 버릴 수 있어?” 나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도대체 어떻게 부모가 자식을 버릴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헨젤의 아버지가 자식을 버리기로 한 결정을 쉽게 내린 것은 아닐 것이다. 책을 덮고, 가난 앞에서 결국 자식을 버리기로 결정하면서 두 아이의 아버지가 했을 무수한 고뇌를 떠올려보았다. 그리고 버려진 아이들이 숲에서 느꼈을 공포에 대해 생각해보다가 문득 두 아이가 무사히 집으로 돌아온 이후의 뒷이야기가 궁금해졌다. 내게는 아이들이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는 사실보다 아이들과 아버지가 이후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결론이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헨젤은 자신을 숲속에 내다 버린 ‘무책임한 아버지’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었을까?
이런 생각을 하던 중 다시 아이가 물었다. “아빠, 왜 동화에선 아빠가 잘 안 나와?” 아이 말을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백설공주》, 《신데렐라》 등 동화 속에서 아버지는 언제나 부재하는 존재다. 자신의 딸이 살해 위협을 받고, 하녀 취급을 당하는 동안에 아버지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자기 아내가 딸을 죽이려고 끔찍한 계략을 세우고 있는데 부왕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나는 동화 속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아버지의 부재’는 아버지가 집을 떠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집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무관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왕이거나 귀족인 아버지, ‘능력 있고 권위적인 아버지’라면 아마 집안 살림은 어디까지나 여자의 영역이라고 여겼을 테니까.
그럼에도 결국 백설공주도, 신데렐라도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한다. 그러면 백설공주는 자신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방관한 아버지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일까? 자신을 하인처럼 대하는 계모를 들인 아버지를 신데렐라는 정말 용서할 수 있었을까?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분노를 그대로 둔 채 어떻게 오래오래 행복할 수 있었을까?

06-01

권위적이고 무책임한 내 아버지
아마도 우리를 키운 아버지들은 거의 대부분 ‘헨젤의 아버지’와 ‘백설공주의 아버지’ 사이 그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아내에게만 아이들을 맡겨둔 채 경제적 책임을 다하는 것에서 가장의 권위를 확인하는 아버지들이 한쪽에 있다면, 가장으로서 모든 책임을 부담스럽게만 느끼고 아이들에게 무관심한 아버지들이 또 다른 한쪽에 있을 것이다.
고백하자면 내 아버지는 어떤 면에서는 백설공주의 아버지, 다른 한편으로는 헨젤의 아버지 같은 이중적 모습이 있는 사람이었다. 사업가이던 아버지는 늘 집안일보다 바깥일에 관심이 많으셨다. 언제나 내가 좋은 성적을 받길 바랐지만 성적이 왜 떨어졌는지, 어떤 과목이 약한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권위적이던 아버지는 언제나 내게 기대가 높았고, 그저 더 좋은 성적, 좋은 대학만 강요하셨다. 아버지는 가장의 도리는 집안일에 매달리기보다 경제적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고 믿었고, 그것으로 아버지는 비로소 권위를 갖는다고 생각하셨다.
백설공주의 부왕만큼이나 권위적이던 아버지는 사업 실패 후 헨젤의 아버지만큼이나 무능력한 아버지가 되었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직전에 시작된 외환 위기로 사업이 큰 어려움을 겪자 아버지는 회사가 도산하기 얼마 전 가족과도 연락을 끊고 오랫동안 숨어 지내야 했다. 아버지의 소재를 수소문하던 중 나는 아버지가 몇 년 동안 외도를 했다는 사실도 알았다. 나는 그때 아버지가 우리를 속였고, 버렸고, 포기했다고 생각했다. 내가 헨젤과 그레텔의 아버지가 두 아이를 버리겠다는 결정을 내릴 때의 고뇌에 대해 떠올려본 것도 어쩌면 내 아버지의 고뇌가 이와 비슷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헨젤과 그레텔은 자신을 버린 아버지와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다고 하는데, 나는 아버지가 외도를 했고, 나와 내 여동생을 버렸다는 사실에 분노한 나머지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었다. 몇 년 후 아버지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신 후에도 나는 아버지를 한동안 이해도, 용서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준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나 역시 어느새 아버지가 되었다.

아버지 역할
능력 있던 아버지는 무능력한 아버지가 되었고, 권위적이던 아버지는 자신감을 잃어버린 초라한 아버지가 되었다. 헨젤과 그레텔과 백설공주와 신데렐라는 어떻게 이 모든 일을 겪으면서도 아버지와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었을까? 동화에서 꼭 말해줬으면 하지만 결국 말해주지 않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해피엔딩 이전에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아버지와의 화해는 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답을 찾고 싶었다.
영화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2013)는 동화가 상상하기를 멈추고 침묵하는 바로 그 지점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일반 영화와 달리 사랑의 시작이 아니라 사랑이 끝난 이후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에는 한 프랑스 가족이 등장한다. 아마드는 4년째 별거 중인 마리와 이혼하기 위해 파리로 찾아간다. 오랜만에 찾아간 집에는 마리가 전남편 사이에서 낳은 두 딸이 있다. 그리고 곧 마리와 결혼할 사이인 사미르와 사미르가 전처와 낳은 아들이 있고, 마리는 사미르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상태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아이들은 엄마인 마리를 통해서만 서로 연결된다. 가족 내에서 아마드는 자리를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다. 그런 이유 때문일까? 아마드는 자신이 아버지이기는 해도 “딸은 이래야 한다”, “엄마라면 당연히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는 식의 당위론적 사고가 전혀 없다. 따라서 당연히 “아버지는 돈을 벌어야 한다”,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행동해야 한다”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딸에게든, 곧 다른 남자와 재혼할 자신의 아내인 마리에게든 오직 ‘인간’ 대 ‘인간’으로 대한다. 자신을 포함해 그 어느 누구도 역할 속에 가두지 않고 기대도 하지 않는다. 대화하지만 강요하지 않고, 사랑하지만 기대하지 않는다.
만약 헨젤과 백설공주가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었다면, 어른이 되면서 아버지를 아버지가 아닌 한 ‘인간’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를 인간으로 사랑했지만 아버지에게 아버지 역할을 기대하거나 강요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해피엔딩, 그리고
아마드처럼 몇 년이 지나서야 다시 가족으로 돌아온 내 아버지는 집에서 완전히 자리를 잃어버린 상태가 되었다. 나와 동생, 어머니 그 누구도 더 이상 아버지의 권위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아버지가 나를 두고 떠난 것처럼 나 역시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를 버려두기로 작정하고 애써 외면했다. 그렇게 몇 해가 지나고서야 나는 이 영화를 만났다.
아마드에게서 내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눈물을 훔치고 나서야 아버지가 나를 힘들게 한 것처럼 나도 아버지를 힘들게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들에게 강요하고 뜻대로 되지 않으면 실망하던 아버지처럼 나 역시 아버지에게 아버지다움을 강요했고 뜻대로 되지 않으면 실망했다. 어쩌면 아버지는 집에서는 아이들을 지켜야 한다는 가장으로서 역할, 회사에서는 직원들을 지켜야 한다는 경영자로서 역할, 부모를 봉양해야 한다는 자식으로서 역할이 주는 무거운 무게에 짓눌려 그저 마음껏 ‘인간’일 수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이기 이전에 한 인간이라는 자각이 있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오직 일에 몰두할 때만 확인할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낮은 자존감도, 부도 이후 모든 책임으로부터 피하고 싶은 아버지의 두려움도, 외도를 한 아버지의 외로움도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나이 많은 아버지의 요구라는 것은 “자주 전화하라” 는 사소한 것뿐인데도 용건 없이 전화하는 일이 죽기보다 싫은 나의 냉정함도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
내 아이가 친밀하게 느껴지지 않아 죄책감을 느낀다는 어떤 아빠와 만난 적이 있다. 아이와 아빠는 반드시 친밀해야 하는 것일까. 아이와의 친밀감을 막는 것은 아이와 ‘반드시’ 친밀해야 한다는 발상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이와 아빠가 서로를 좋은 인간으로 생각하며 서로에게 어느 정도 호감을 갖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내가 만들어둔, 꿈꾸고 있는 ‘아버지’라는 역할을 아버지에게 강요하지 않기. 이것이 바로 우리 아버지들이 못 했던 것이고, 아버지가 된 내가, 동시에 한 아버지의 아들인 내가 지금 해야 하는 것이다.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아가는 해피엔딩을 위한 시작인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과 딸을 사랑했고 특히 아들에 대한 기대가 컸습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집안이 기울었고 아버지는 아이들을 두고 집을 떠나야 했습니다. 버려진 아이들은 어둠 속에서 추위에 떨어야만 했습니다. 몇 년 후 아버지는 집으로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아이들은 아버지가 돌아와 너무 기뻤습니다. 이후 모두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 살았습니다. 다만, 아이들과 아버지의 관계는 예전과 달라졌습니다. 아버지는 자식을 두고 떠났다는 미안함에 아들에게 기대로 부담을 주는 대신 사랑을 주려고 했습니다. 아이들은 아버지가 자신들을 두고 떠났다는 사실이 몹시 화가 났지만, 아버지도 아버지이기 이전에 어쩔 수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성장하면서 깨달았습니다. 서로에 대한 무거운 기대는 내려두고, 서로를 자식과 부모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으로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그 덕분에 아이들과 아버지, 어머니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06-02

권영민

서울대학교에서 서양철학을 전공하고, 철학을 공부하는 공동체인 ‘철학본색’을 운영하며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숙원하던 음악 공부를 위해 유학길에 오른 아내를 대신해 아들 선재를 키워낸 값진 경험을 육아일기로 기록했다. 그 기록을 엮어 <철학자 아빠의 인문육아>라는 책으로 출간했다.6년 터울로 태어난 둘째 선율이 덕분에 다시 육아 전쟁을 치르고 있지만, 아이 둘이 함께하는 완전한 삶을 만들어보겠다고 매일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