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eaming of Style 40th

스타일 불혹不惑을 꿈꾸며

나이 마흔, 누가 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나만의 시그너처 룩을 갖고 싶었던 어떤 한국 신사의 번뇌.

공자는 일찍이 〈논어〉 ‘위정 편 爲政篇’에서 한 남자가 생을 살아가면서 이뤄가야 할 학문 수양의 발전 단계를 제안한 바 있다. 15세에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에 이미 뜻을 두고(志學), 30세엔 이미 그 기초를 공고히 했으며(而立), 40세가 되어서는 그 자존감이 어떤 유혹에도 미혹되지 않았다(不惑)는 식으로 이어지는 내용이다. 아마 다들 알고 있는 이야기다.
2~3년 전쯤인가 마흔을 목전에 둔 시점에 이 내용을 떠올리며 문득 불혹이라는 단어를 생각의 중심에 가져다 둔 적이 있었다. 그러곤 과연 나는 세상의 어떤 유혹에도 미혹되지 않을 수 있을 나이에 이르렀는지 고민한 기억이 난다. 단지 학문의 수양 단계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자아실현과 자존감과 관련한 이야기라는 데까지 생각이 이르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도 그 고민의 해답을 얻지는 못했지만, 삶이 고단하다는 핑계로 가슴 한쪽 어딘가에 잠시 묻어두고 마치 완치되지 않는 무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화상의 흉터처럼 안고 살아가는 중이다.

이는 나만의 상황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적 불확실성과 불안감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보지만, 한국의 40대 남자에게 스타일링의 정체성을 논하는 것은 언감생심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오래전 선비들은 스무 살 즈음에 자아를 찾고 존재감을 확립해 立身(입신)하여 揚名(양명)하고,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내적 완성도를 높이면서 상황과 경우에 따라 오롯한 취향에 따라 의관을 정제하면서 살아왔다. 남자가 갖춰야 할 것을 이미 어린 나이에 갖추고 자립해 확고한 자아와 세계관을 공고히 했으니 30~40대에는 이미 스타일이라는 자아의 외적 실현이 가능한 일이었을 터. 요즘 상황을 보면 남자들이 자신만의 시그너처 룩을 갖추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자아에 대한 확신이 없는 우리에게 매번 변하는 새로운 트렌드는 얼마나 강력한 영향을 줄까? 한편, 남자의 스타일이라고는 평생 고민도 해본 적 없는 어머니가 골라준 옷을 입다가, 결혼해 분가하면 아내가 골라주는 옷을 다양한 이유로 받아 입는 남자에게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가는 일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운 일임이 분명하다.

게다가 남자의 스타일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줘야 할 아버지와 할아버지 세대는 해방과 한국전쟁이라는 격동의 풍랑을 헤치고 살아남은 것 자체에 감사해야 했으니 그저 ‘잘 살아보세’라는 새마을 건설에만 마음이 급했던 통에 손자에게 남겨줄 번번한 시계 하나, 오래 물려줄 잘 만든 안경 하나 마련하지 못하고 살아온 것이 현실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우리네 대한 남아들이 유혹에 귀를 팔랑거리며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하는 건 당연한 결론이 아닌가 한다.
솔직히 IT업계 슈퍼스타 CEO 옷차림에도 불만이 있다. 매력 넘치는 단순미로 세계의 환호를 받은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구사한 검은색 폴라티와 조깅화 똑같이 입기 신공은 이제 마크 주커버그에게로 넘어갔다. 똑같은 회색 티셔츠를 수십 벌 걸어놓고 살아가는 인터넷업계의 억만장자의 옷 입기는 진정한 의미의 시그너처 룩이라기보다는 ‘커리어 성취로 얻은 자신감으로 옷이 가진 사회적 기능은 무시하기. 은둔형 외톨이적 시절의 옷차림 주장하기’에 더 가깝지 않을까. 이런 옷차림을 시그너처 룩이라고 치켜 세우는 미디어에 농락당해온 우리 신세도 참 처량하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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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뿔싸, 이렇게 한참을 늘어놓고 보니 처량한 신세 한탄뿐이다. 스타일이라는 것이 돈이 많은 이, 엄청난 업력을 자랑하는 이의 것만은 아닐진대 서글픈 남 탓으로 삶의 여분을 비관적으로 채워나가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스타일에 녹여온 몇몇 남자를 떠올리면서 내 스타일의 방향성도 조금 갖춰보는 건 의미가 있는 일이 아닐까?
험한 일과 상황을 겪다가 일약 스타덤에 올랐지만 자신에겐 검소하려고 노력했다는 영화배우 스티브 매퀸은 몇 가지 단순한 아이템만으로도 자신만의 스타일을 완성한 바 있다. 영화 속 트위드 재킷과 터틀넥 스웨터는 단순한 아이템이지만 손쉽게 캐릭터를 만드는 특징이 있다. 나이 들어 보인다는 숄칼라 카디건이나, 바라쿠타 점퍼도 단순하고 깔끔하게 차별화된다. 이렇게 특별한 한 사람을 아이콘으로 삼아 스타일을 흉내 내보는 것은 평범한 우리가 인생의 지향점을 만들고 스타일을 외적으로 만들어가는 좋은 방법론이 될 것이다.

그 밖에도 삶의 주제를 정하고 그 주제에 맞춰 즐겁게 멋을 만들어가는 이도 있다. 헤밍웨이는 자신의 작품 〈노인과 바다〉를 평생 실천하고 싶었던 사람이 아니었나 싶다. 거친 바다 사나이의 룩을 염두에 두고 두툼한 터틀넥으로 겨울을, 시원한 쿠반 셔츠로 여름을 나는 식으로 그가 남긴 여러 사진은 여전히 많은 이에게 스타일의 교과서가 되고 있다. 이렇게 자신의 취향을 반영하는 주제 의식을 옷차림에 반영하는 방법도 자신만의 시그너처 룩을 만들어가는 손쉬운 방법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어릴 적 나무로 만든 화구 박스가 부러워 미술을 시작한 유명한 작가 이야기가 생각난다. 자아의 실현은 반드시 심오한 철학에서만 시작하는 건 아니다. 우리의 외적 자아를 조금식 빚어나가다 보면 그 골 안에 정신이 채워지기도 하는 법. 그렇게 믿으며 멋을 내고 있다.

Lessons for fathers

시그너처 룩을 만드는 가장 쉽고 빠른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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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쉽게 시그너처 룩을 만드는 방법은 특정한 패턴이나 컬러를 지정해서 자주 입는 것이다. 예를 들면 깅엄 체크나 프린스오브웨일스 prince of wales 체크 아이템을 구입해서 자주 착용하면 각인 효과가 생겨 시그너처 룩을 쉽게 만들 수 있다. 좀 더 고난도 방법은 특정한 컬러를 다양한 아이템에 적용하는 것이다. 핑크나 오렌지 같은 컬러는 남자가 과감하게 활용하기 힘든 색상이다. 한 지인은 핑크 계열의 다양한 셔츠를 열 벌 이상 마련해서 돌려 입는다. 지갑이나 필통 같은 작은 소품이나 양말 같은 것을 특정 색깔로 구매해서 자주 사용하면 주변 사람들이 그 컬러를 보면 자연스럽게 나를 떠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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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

작가, 칼럼니스트. 조선일보에 ‘오빠와 아저씨는 한 끗 차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연재 중이며 동명의 책을 출간했다. 한국 신사라는 필명으로 네이버 블로그를 10년 가까이 운영해오고 있으며, 또 다른 저서로는 <신사용품>이 있다. 남자의 취향에 대한 글을 다양한 매체에 기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