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qual Sundays for All

누구에게나 공평한 일요일

시간의 흐름과 계절의 변화처럼 주말의 평화도 모든 이가
공평하게 나눠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

어느 가장의 평범한 일과
일요일 새벽, 세탁할 옷들을 가방에 담아 빨래방으로 향한다. 주중에도 최소 두세 번은 집에서 세탁기를 돌리지만 일요일이 되면 어김없이 산더미처럼 빨랫감이 쌓인다. 빨래를 하고, 널고, 개면서 하루를 보내다 보면 ‘하느님도 쉬셨다는 휴일에 나는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는 서러움이 밀려온다. 게다가 방에서 옷을 말려야 하는 처지라면 습기 가득한 좁디좁은 공간이 참으로 원망스럽다. 집안일의 징글징글한 연속성은 사람을 참 지치게 만든다. 내게 빨래방은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하나의 수인 셈이다.


세탁 4000원, 건조 4000원이면 뽀송뽀송한 옷들을 1시간 내로 만난다. 이제 본격적으로 주말을 주말답게 보내볼까? 지친 일상을 내려놓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 어디라도 갈까? 불가능하다. 나는 집안일 하나를 조금 빨리 끝냈을 뿐이다. 여전히 할 일은 천지다. 가족들 아침 식사를 준비해야 하고, 이후에는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야 한다. 도서관에 가서 연체된 책을 반납해야 하며, 자전거로 동네 한 바퀴를 돌아야 한다. 때로는 박물관에 가거나 어린이가 볼만한 영화의 보호자 관람객이 되기도 한다. 저녁이 되기 전 마트에 들러 이것저것 찬거리를 사는 것도 필수 일과 중 하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끝나야 나는 본업인 읽고 쓰기를 할 수 있다. 평일도 마찬가지다. 집필과 강연이라는 돈 버는 일을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서 처리해야 할 돈 안 되는 일을 제때 끝내야겠다는 조급함. 이 두 가지는 늘 내 어깨를 짓누른다. 내게 일상을 끊는 온전한 휴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주말 새벽, 경쾌하고 낯선 발걸음
가끔은 억울하다는 생각이 스치기도 한다. 다른 남자들은 나처럼 살지 않는 모습을 볼 때면 더욱 그렇다. 일단 빨래방에서 중년의 남자를 보는 것이 쉽지 않다. 나처럼 여성의 속옷부터 아이의 양말까지 들고 오는 사람은 전부 여자다. 가끔 남편으로 추정되는 사람은 엄청 크고 두꺼운 이불을 들고 반드시 아내와 함께 나타난다. 짐꾼 역할만 하겠다는 자세가 다분해 보이는 남자들은 그 공간을 낯설어한다.


건조가 끝난 옷들을 개면서 창밖을 보면 나와는 다른 일요일을 시작하는 남자들이 지나간다. 옷차림과 들고 있는 가방으로도 오늘 무엇을 하려는지 알 수 있다. 등산이나 낚시, 야구, 축구 혹은 골프를 하러 가는 사람들이다. 새벽부터 저리 서두르지만 표정은 무척 밝다. 출근길에는 볼 수 없는 얼굴이다. 집 안에서 밖으로 나와 가족이 아닌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경쾌하기만 하다. 마치 이날만 기다려왔다는 결의마저 느껴진다. 저들은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 이들을 만나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재충전’의 시간을 보낼 것이다. 일부는 헤어짐이 아쉬워 거하게 회식을 하고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집을 떠난 지 열네다섯 시간 만에 돌아오는 남자들 중 한 명일지도 모른다. 우습기도 하지만 아주 약간은 부럽기도 하다.


사람들은 이런 나의 푸념을 들으면 “너도 그렇게 해”라고 망설임 없이 말한다. 여기까지는 괜찮은데 다음이 문제다. 내가 그럴 형편이 아니라는 표정을 지으면 그들은 꼭 아내의 근황을 확인한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말투가 심한데 이런 식이다. “도대체 아내는 주말에 뭐 한다고, 너 혼자 그렇게 고생을 사서 해?” 아내랑 ‘함께’도 아닌, 아내가 ‘희생하면’ 주말을 참으로 멋있게 보낼 수 있다는 논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주중에 열심히 일하는 가장에게는 주말에 ‘그럴’ 권리가 원래 주어져 있는데, 왜 그걸 마다하고 고난의 길을 걷는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추궁한다. 그에게 나는 이렇게 말한다. “내 아내가 왜 그래야 하죠?” 상대는 원하던 답이 아니어서 당황한다. 필시 내가 이러는 건 아내가 아프거나 혹은 경제활동을 책임져서 인류가 합의한 가정 내 남녀 역할을 임시적으로 조정했을 거라고 멋대로 생각했나 보다.

가정 내에서 일어나는 불평등
내 상황과 아내가 무관한 것은 아니다. 나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일을 하는 아내의 온전한 휴식을 보장하기 위해서라도 일요일 일과를 이어가는 루틴을 파괴할 수 없고, 일요일만의 새로운 루틴을 만들 수도 없다. 애처가 나셨다고 운운하겠지만, 내가 그러는 이유는 사람으로서 불평등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내는 12년간 경력 단절의 세월을 보냈다. 결혼한 지 12년이니 그 이유는 돌려 말할 필요 없이 ‘나’ 때문이다. 나는 “여자는 집에서 살림이나 하라”고 말한 적이 없다. 머릿속에 그런 생각 자체가 없지만 사회구조의 힘은 대단했다. 아기가 있는 상태에서 부부가 함께 일을 하려면 어떤 식으로든 비용이 발생한다. 아내와 나 둘 중 하나는 여러 육아 변수를 감당할 수 있어야 하니 서로가 일에 집중하기 힘들고 스트레스만 쌓여간다.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진 상황에서 부부는 고민에 빠진다. 장기적으로 볼 때 누가 일을 계속해야 가정 내 소득이 높아질까? 원초적인 질문의 답을 찾다보니 내가 경제활동에 매진하고, 아내는 남편의 집중력을 흩뜨리지 않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신경 쓰게 되었다.


가정을 유지하기 위한 두 남녀의 노고는 보상의 크기가 완전 다르다. 나는 책도 내고 방송에도 나오고 성장해가지만, 아내의 ‘육아 경력’은 최저임금 받는 일자리를, 그것도 겨우 구할 수밖에 없는 ‘원인’이 되었을 뿐이다. 불평등의 덫은 아주 견고하다. 아내는 12년 만의 외출을 시도하면서도 생계 주 부양자의 삶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일하는 파트타임 자리를 구했다. 자신의 미래를 생각해서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한 게 아니라, 딱 그 시간에 할 수 있는 일에 적성을 맞췄다. 그 덕에 나는 여전히 새벽에 출발하거나 밤늦게 돌아오는 일정을 마다하지 않는다. 내 선택에 맞추어 아내는 묵묵히 자기 일이라고 여기는 육아와 살림을 제때 해낸다.


그 덕에 나의 평일에는 순간순간 ‘일상을 끊는’ 시도들이 존재한다. 집에 들어가는 길에 잠시나마 모든 근심을 내려놓고 소주 한잔할 여유가 내게는 있다. 때로는 ‘에라 모르겠다. 별일 있겠냐’면서 휴대폰을 끄고 영화를 보기도 한다. 하지만 아내는 친구와 맥주를 한잔하는 데도 내가 저녁에 집에 복귀하는지 미리 스케줄을 확인해야 한다. 누군가의 불평등한 삶을 기반으로 수월한 평일을 보낸 내가 어찌 주말을 주말답게 보내지 못한다고 투덜거릴 수 있단 말인가.

나만의 주말을 보장받아도 될까?
가장들은 가족을 책임진다는 이유로 가정이 불평등하게 유지되는 것을 오랫동안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렇다고 그러면 안 되지만, 그렇게 행동했다. 힘들다며, ‘돈 벌어 오는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말라면서 소리쳤다. 생각하던 권위가 통하지 않으면 가족이 자신을 무시한다면서 화를 냈다. 누군가를 함부로 대했으면 성찰해야 맞지만, 남자들은 돈 버는 ‘비애’에 자신을 연결시키는 것에 더 익숙했다.


영화 〈우아한 세계〉의 마지막 장면을 보고 뭉클하지 않을 ‘아빠’는 없다. 강태구는 조직폭력배로 살면서도 가족 앞에서 당당하고 싶어 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목숨 내놓고 일하는 남편을 아내가 좋아할 리도, 담임교사에게 단란주점 이용권을 주는 아빠를 딸이 신뢰할 리도 만무하다. 결국 기러기 아빠가 되어 늘어진 러닝셔츠에 사각팬티 입고 처량하게 라면이나 끓여 먹는 신세가 되는데, 아내는 딸의 즐거운 외국 생활을 영상으로 담아 남편에게 보낸다. 화면에 등장한 딸의 행복한 표정에 아빠는 뿌듯해하다가, 가족을 위해 평생 일한 자신은 왜 함께하지 못하는지 서글퍼 울면서 그릇을 뒤엎어버린다. 그리고 궁상맞게 바닥에 떨어진 라면을 주워 담으며 영화는 끝난다. 전문가들은 이 장면을 보고 “밥벌이의 더러움과 서러움과 지겨움”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아! 아버지는 고독하다. 힘들지 않은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많은 남성은 이 비애를 감추지 못한다. 어깨가 축 처진 만큼 가정에서 다른 이의 희생을 요구한다. 밥벌이가 고단하니 육아와 집안일은 아내가 책임져야 하고, 평일 내내 피로하니 주말에는 혼자만의 시간을 보장받아야 한다. 사회가 개인을 어떻게 괴롭히는지를 묻기보다는 그저 가장의 무게라는 단어만 남발하는 세상에서 수많은 가장은 집 안의 불평등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래서 다른 이에게 ‘끊이지 않는’ 집안일을 전가하고, 자신은 평일의 삶을 ‘분리하는’ 주말을 보상 차원으로 소비하게 된다. 물론 잘 쉬고 노는 건 무척 중요하다. 하지만 그 안에도 빌어먹을 불평등이 있는지 계속해서 돌아봐야 한다.

오찬호

작가이자 사회학 연구자로 사회 전반의 이야기에 “왜?”라는 물음을 건넨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를 비롯해 《결혼과 육아의 사회학》, 《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 《그 남자는 왜 이상해졌을까》 등을 썼다. 해서와 해준이에게 부모에 의한 편견과 선입견을 전해주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