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 it the Weekend? Oh, It is the Weekend!

주말인가요? 아, 주말이군요!

개별적이기보다는 묵직한 하나의 흐름으로 기억되는
한 평론가의 주말에 대한 단상.


주말인데도 한의원에는 오전부터 꽤 많은 사람으로 붐볐다. 나는 접수를 마치고 대기석 구석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있었다. 목이 한쪽으로 잘 돌아가지 않을뿐더러 허리 쪽에도 욱신거리는 통증이 있었다. 비스듬히 기댄, 어찌 보면 약간은 불량해 보이는 자세로 내 앞의 허공에 무심히 시선을 던져두고 있는데, 목발을 짚고 내 앞을 지나는 한 사람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자세를 바르게 곧추세웠다. 모순적으로 들리겠지만, 내 앞을 지나는 그 사람의 걸음은 전적으로 두 개의 목발에 기대고 있어 아슬아슬해 보이면서도 동시에 오랜 시간 그 일을 해온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안정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게 묘하게 사람을 긴장시키며 자세를 바로잡게 만들었다. 하얀 가운을 입은 모습으로 짐작하건대 그 사람은 이곳의 한의사 중 한 분인 듯 보였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간호사가 내 이름을 호명하며 진료실 앞으로 나를 인도했다. 문진을 하면서 전해 받은 담당 한의사의 조곤조곤한 목소리는 벌써 내 몸의 근육들을 어루만져주는 것만 같았다. 그 목소리는 몇 가지 질문을 던진 후 마지막으로 나에게 평소 안 쓰던 근육을 요즘 자주 쓸 일이 있었는가를 확인했는데, 나도 모르게 “집에 태어난 지 8개월 된 아이가 있어요”라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순간, 아주 잠깐이었지만 나의 답이 진료실 공기를 약간 어색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하지만 담당의는 흔들림 없이 “그랬군요”라는 말로 그 어색한 공기 역시 어루만져주었다. 진료를 마치고 나오는 내 등 뒤에서 한의사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한동안은 계속 그러실 거예요. 근육을 한쪽으로 몰아 쓰지 말고 골고루 써야 한다는 걸 의식하면서 아이를 안아줘야 해요. 힘을 분산하는 일을 해야 해요”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한의원이었는데, 나는 부러 빠른 길을 피해 최대한 먼 거리로 차를 몰아 귀가했다. 귀가하는 차 안에서 침을 맞기 위해 엎드려 있던 공간에서 들은 목발 소리를 다시 떠올렸고, 그 불안한 소리를 가라앉히던 한의사의 나지막한 목소리도 되새김질했다. 내가 닮고 싶은, 고요함과 안정감을 품은 목소리를 흉내라도 내보겠다는 듯 나도 모르게 침을 삼키고 목 근육을 이완시키던 찰나, 내 목에서 튀어나온 건 짧은 탄식을 동반한 욕설이었다. 신호를 위반한 좌회전 차량이 내 차의 진행에 갑작스럽게 끼어들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사고는 피했지만 내 마음은 이미 사고가 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클랙슨을 울리며 상대에게 분노를 강력히 표출했고, 상대의 차량은 다소 미안한 움직임을 보이며 내 시선에서 천천히 사라져갔다.


운전을 시작한 지 반년이 채 되지 않았다. 연우가 우리 가족 구성원이 되면서 생긴 커다란 변화 중 하나가 내가 차를 운전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슬며시 부끄러운 고백을 조금 보태자면 나는 그냥 운전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운전을 하며 욕하는 사람이 되었다. 출퇴근하며 지나는 길바닥은 종종 나의 욕받이가 되곤 했다.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시작이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욕설을 한 뒤 느끼는 어떤 해소감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무언가 나를 답답하게 하던 것이 일순 내 목을 통해 토해져 나옴과 동시에 가슴 한쪽에 미풍 같은 것이 스쳐 지나는 기분이 든 것이다. 그 뒤로 나는 운전 중인 차 안에서 꽤나 격정적으로 그리고 큰 소리로 욕설을 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위협적인 차량의 등장과 무관하게 발작적으로 그러기도 했다.


하루는 직장 동료 한 명을 차에 태우고 귀가하는 날이었다. 나는 그에게 차를 운전하다 보니 운전자만 아는 별별 일이 다 있는 것 같다며, 실은 요즘 차 안에서 종종 욕을 한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동료는 나의 말에 웃음으로 답하면서 아마 대부분의 운전자가 그럴 거라는 과장된 동의를 표해주었다. 그러고는 본인 역시 종종 그런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 뒤 직장에 대한 불만과 몇몇 인사에 대한 뒷담화를 나누던 대화의 흐름은 어느 사이 자연스레 육아의 고충과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로 흘렀다. 동료는 중학교 3학년이 된 아이가 음악 쪽으로 진로를 택하면서 부딪힌 갈등과 고민을 토로했고, 이번 주말에는 그 아이가 빠져 있는 아이돌의 콘서트장 주변에서 공연을 보고 나올 아이를 지루하게 기다리며 보내야 한다며 울상을 지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려 빈자리를 찾고 있는데 먼저 주차된 차량 아래서 고양이 몇 마리가 차 밖으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큰 고양이 한 마리가 작은 고양이 세 마리를 이끌고 가는 모양새가 가족 무리처럼 보였다. 앞의 큰 고양이는 엄마처럼 보였는데 어디서 다쳤는지 발 한쪽을 절고 있었고, 겉으로 보기에도 여러 신체적 컨디션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어린 고양이들의 상태는 나빠 보이지 않았다. 세 마리 중 한 마리는 일행을 따라가다 햇볕이 살짝 비치는 자리에서 몸을 몇 번 뒹구는 여유도 보였다. 주말에도 길고양이들에게 밥을 주는 캣맘이 있겠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빈자리에 차를 댔다. 그리고 전화를 받았다.


아내는 내가 진료를 잘 받았는지 그리고 지금은 어디쯤인지를 확인했다. 더불어 부모님이 어디쯤 오고 계신지도 덧붙여 말했다. 확실히 주말마다 방문객이 늘었다. 연우가 보고 싶으신지 친가, 외가 할 것 없이 부모님이 우리 부부의 주말 스케줄을 자주 확인하셨고, 큰 스케줄이 없는 날에는 종종 우리 집을 방문하시곤 했다. 부모님의 방문은 우리 부부에게 약간의 휴식이 생긴다는 말이기도 하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손에 연우가 안겨 있는 동안 나와 아내의 손은 어떤 임무와 책임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묘하게도 연우를 토닥이거나 연우를 안거나 하는 일에서 자유로워진 아내의 손은 유독 작아 보였다. 결혼 전 아내의 말을 통해 아내가 원래 손이 작은 사람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시각적으로 그걸 쉽게 알아채는 일은 드물었다. 그러던 중 최근 처가에 내려가 연우를 곁에 두지 않고 잠든 아내의 모습을 바라보다 유독 작은 그녀의 손을 확인한 적이 있다. 그 손이 괜스레 아파 보였다.


고향에서 올라 오신 부모님의 손에는 연우의 옷 몇 벌과 밑반찬, 그리고 몇 종류의 김치가 들려 있었다. 아버지는 그사이 연우가 꽤 컸다며 흐뭇하게 말씀하시고는 연우가 본인들을 알아보는 표정을 짓자 행복한 미소를 얼굴에서 떠나보내지 않으려 하셨다. 어머니는 아내의 손을 꼭 잡으며 그사이 또 얼마나 고생이 많았냐는 인사를 잊지 않으셨고, 아내의 작은 손을 놓지 않으려 하셨다. 연우는 할아버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만져보다 휙 고개를 돌려 나를 보거나 다시 아내나 어머니를 보기도 했다. 갑자기 눈을 맞출 존재가 늘어나자 녀석은 신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어리둥절해하는 것도 같았다. 문득 연우에게도 ‘주말의 감각’이라는 것이 있으려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우가 태어나고 스물두 번 정도의 주말을 맞았다. 아내에게도 나에게도 그 주말들은 개별적인 하루하루로 기억되기보다는 묵직한 하나의 흐름으로 기억된다. 그 묵직한 흐름이 여러 가지를 바꾸어놓았다. 근육을 바꾸었고 감정을 바꾸었으며 시선을 바꾸었고, 결국 존재를 바꾸었다. 두 명의 가족에서 세 명의 가족으로 거듭나며 나와 아내는 다른 존재가 되었다. 이렇게 적고 보니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 사람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지나온 강 건너편에는 웃고 떠들고 마시며 금요일에서 토요일 새벽으로 와 결국에는 토요일 새벽쯤에 문득 토요일 자정을 맞이하는 아내와 나의 부은 얼굴이 있고, 때로는 간단한 소풍 가방을 싸서 산을 오르는 아내와 나의 발걸음도 있다. 여유롭게 자전거를 타다 아무 곳에나 정차해 음료를 마시는 일요일 오후도 보이고, 영화관의 어둠 속에서 아내의 작은 손을 잡고 소곤거리며 걸어 나오는 토요일 밤의 내 얼굴도 보인다. 카페에서 두툼한 책을 읽다 멍때리며 창밖을 보는 아내의 얼굴은 일요일 한낮을 떠올리게 한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하고 빈둥거리며 거실에 누워 있는 내 모습은 주말이라면 어느 순간에나 잘 어울릴 것이다.


이제 그런 모습은 당분간 불가능할 것이다. 연우가 중학생 정도쯤 성장하면 다시 그런 일상을 만드는 일이 가능하려나? 그때쯤이면 나 역시 직장 동료처럼 어느 콘서트장 주변에서 지루한 얼굴로 아들을 기다리는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모를 일이다. 혹 그사이 연우의 동생이 태어난다면? 둘에서 셋으로, 혹은 넷으로의 변화는 실로 어마 무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예측은 불완전하다. 그러나 확실히 아는 한 가지는 나도 아내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주말에도 그리고 주중에도, 아니 시간 개념없이 연우와 함께 행복해지려고 온 힘을 다하는 중이다. 아이가 태어나고 그 아이와 함께 지낸 시간이 아직은 그리 길다고 할 수 없지만, 조금씩 어떤 확신이 생긴다. 육아에 시달리며 피로가 쌓인 엄마 아빠의 모습은 단지 피곤에 찌든 상태가 아니라, 최선을 다해 아이와 살아가는 증거라는 확신 말이다. 아이는 부모를 필사적으로 만든다. 그리고 그것은 아픈 몸을 하고도 먹이와 잠들 자리를 찾아 아기 고양이들을 이끄는 어미 고양이의 움직임처럼 본능적이다. 우리는 어쩌면 본능적으로 우리보다 약한 존재를 돌볼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났는지도 모른다. 그 능력이 아내와 나에게 새로운 주말을 만들었으며, 그래서 우리는 한동안 자주 이렇게 말하며 살게 될지도. “주말인가요? 아, 주말이군요!”

송종원

소설과 시를 자신만의 눈으로 담고 품는 문학평론가. 대학에서 문예창작과 학생들을 가르치고, 수필을 통해 일상에 작은 질문을 건네기도 한다. 근래 가장 큰 기쁨은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는 연우의 맑은 미소를 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