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bjects Reflecting a Father’s Life

아버지의 삶이 담긴 물건

아버지의 물건을 통해 마음속에 간직한 기억의 조각을 꺼내본다.

08-01

차현권(36세), 부산 ‘레드블럭’ 이발사
1990년 ‘미소 속에 비친 그대’로 뜨거웠던 가수 신승훈이 부산 공연을 올 때마다 머리를 깎을 만큼 아버지는 실력이 뛰어나셨다. 20대부터 미용 일을 배운 아버지는 강요하진 않았지만 기술을 배워두면 쓸데가 있다며 고등학교 3학년 무렵부터 일을 조금씩 가르쳐주셨다. 난 어쩐지 흥미가 없어 성인이 된 후 배우고 그만두기를 반복했다. 군대 제대 후 서핑 코치를 시작으로 다양한 일을 경험했고, 결혼을 생각하니 떳떳한 직업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에 아버지 곁에서 다시 가위를 잡았다. 아버지는 당신이 쓰던 20년 훌쩍 넘긴 가위를 흔쾌히 내주셨다. 물건 하나 허투루 고르지 않는 분이셨기에 아버지의 물건을 더욱 신뢰했다. 나는 지금 아버지처럼 이발사가 되었다. 가끔 나는 아버지 머리를, 아버지는 내 머리를 서로 다듬어준다.

차현권(36세), 부산 ‘레드블럭’ 이발사
1990년 ‘미소 속에 비친 그대’로 뜨거웠던 가수 신승훈이 부산 공연을 올 때마다 머리를 깎을 만큼 아버지는 실력이 뛰어나셨다. 20대부터 미용 일을
배운 아버지는 강요하진 않았지만 기술을 배워두면 쓸데가 있다며 고등학교 3학년 무렵부터 일을 조금씩 가르쳐주셨다. 난 어쩐지 흥미가 없어 성인이 된 후 배우고 그만두기를 반복했다. 군대 제대 후 서핑 코치를 시작으로 다양한 일을 경험했고, 결혼을 생각하니 떳떳한 직업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에 아버지 곁에서 다시 가위를 잡았다. 아버지는 당신이 쓰던 20년 훌쩍 넘긴 가위를 흔쾌히 내주셨다. 물건 하나 허투루 고르지 않는 분이셨기에 아버지의 물건을 더욱 신뢰했다. 나는 지금 아버지처럼 이발사가 되었다. 가끔 나는 아버지 머리를, 아버지는 내 머리를 서로 다듬어준다.
08-03

최홍주(35세), 설치미술 작가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빛바랜 스케치를 스크랩 파일에 차곡차곡 간직해오셨다. 아들과 손주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명절이면 스케치에 담긴 이야기보따리를 푸셨다. 할아버지는 이북에서 자랐셨다. 삼형제와 함께 남으로 피란 온 직후 6·25 전쟁이 터졌고, 그렇게 부모님과 생이별을 하셨다. 할아버지는 그 시절 담뱃갑 삽화가로 활동할 정도로 실력이 출중하셨다. 그림은 대부분 초상화였는데, 이북에 계신 부모님을 행여 잊을까 부모님 얼굴을 끄적거리는 거라고 하셨다. 중풍에 걸리고도 그림 그리는 일만은 손에서 놓지 않으셨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그동안 그렸던 스케치는 아버지에게로, 또 나에게로 전해졌다. 아버지는 취미 삼아 그림을 그리고, 나는 그림 그리는 일을 직업으로 삼았다. 할아버지의 오래된 스케치를 보며 가끔 작업하면서 겪는 고단함을 위로받곤 한다.

은종복(52세), 책방 ‘풀무질’ 운영
아버지는 20년간 책방을 운영하셨다. 아버지의 매 끼니는 어머니가 싸주신 도시락이었다. 그동안 점심밥을 밖에 나가서 드신 일은 손가락으로 꼽는다. “네 아버지는 밥을 많이 드신다. 꼭 제때 밥을 챙겨 드시게 해라.” 어머니는 책방에서 함께 일하는 두 아들에게 당부하며 아버지의 고봉 밥 그릇에 한가득 밥을 챙겨주셨다. 지난해 아버지께서는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다. 서점에서 일하는 아들 도시락을 교대로 챙겨주시던 아버지는 지금 누워 계신다. 아버지가 쓰던 고봉 밥 그릇은 이제 아들의 국그릇이 되었다. 그 그릇을 볼 때마다 밥을 유난히 많이 드시던 아버지가 사무친다. “아들, 밥을 꼭 챙겨 먹어. 한 때를 굶으면 평생 찾아 먹기 힘든 거야.” 아버지가 하루빨리 일어나 점심밥을 함께 먹을 수 있길 기도한다.

08-04

이주연(36세), 포토그래퍼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아버지는 트럼펫을 시작했다. 학창 시절 내내 악대부 활동을 했고, 공군음악대와 음대를 거쳐 고등학교 음악 선생님이 되셨다. 시립교향악단 연주, 윈드 오케스트라 지휘까지 아버지는 55년을 한결같이 트럼펫과 함께했다. 나는 악기 중 트럼펫 소리를 가장 좋아한다. 정확히 말하면 트럼펫보다 아빠가 연주하는 트럼펫 소리를 추억하는 것 같다. 이제는 트럼펫을 불 때 생기는 압력으로 흔들리는 치아가 걱정되어 아버지의 트럼펫 소리를 듣기가 어렵다. 그런 아빠를 두고 이제야 트럼펫을 배워보려고 한다. 직접 불어보니 트럼펫이 보통 어려운 악기가 아니다. 하루 쉬면 하루 전의 실력으로 돌아간다는 아버지의 말씀이 이제야 이해가 간다. 아버지가 조금이라도 더 건강하실 때 배워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마음을 꾹 누른다. 트럼펫을 든 아빠의 모습은 진심으로 멋지다. 언제가 될지 모를 딸의 결혼식에 축가를 연주해주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08-05
08-06

오정림(38세), 〈맘&앙팡〉 편집장
아빠는 주말이면 거실에 앉아 사슴 가죽의 노란 클리너를 꺼내 카메라 렌즈를 정성껏 닦으셨다. 나와 연년생 동생을 키우며 웬만해선 하루도 거르지 않으신 일이다. 내가 첫 뒤집기에 성공하거나 발뒤꿈치를 들어 장식장을 붙잡고 서는 찰나, 아빠가 집요하게 담아낸 특별할 것 없는 가족의 순간들은 다섯 권의 앨범에 빼곡히 담겨 있다. 나와 동생이 피사체가 되길 거부하기 시작한 사춘기 언제쯤부터 아빠의 카메라는 장롱 안으로 깊숙이 숨어버렸다. 그리고 필름 카메라가 갖고 싶다는 딸 부탁에 10년 만에 카메라를 새 단장해 내게 주셨다. 그때만 해도 사진 찍기 좋아하는 아빠 덕에 어린 시절 사진은 많아서 좋네 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엄마가 되고 나서야 부모에겐 놓치고 싶지 않은 순간들이 무수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빠의 카메라가 아빠의 기억과 함께 내게 왔다.

윤성현(41세), 라디오 PD
아버지는 평생 군인이나 경찰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계셨다. 힘없는 사람이 평탄하게 살아가기 힘들었던 시절, 그 반작용으로 실체적 힘, ‘무력’을 소유한 집단에 대한 동경이 아니었을까 싶다. 당신은 어릴 적부터 가난한 삶의 무게에 떠밀려 원하는 직업을 갖지 못했고, 아들인 내가 대신 그 꿈을 이뤄주기를 바라셨다. 귀한 외동아들을 보이스카우트에 보낸 것도 그 때문이었으리라. 멋지게 제복을 차려입고 야영을 앞둔 어느 날, 아버지는 내게 쌍안경과 수통을 내밀었다. 쌍안경은 그렇다 치고, 수통은 그야말로 물통이라 부르기엔 너무나 군인의 수통 그 자체였다. 어린 내겐 그저 재미난 물건이었지만, 이제 와서 읽히는 아버지의 생각, 아버지의 순진한 희망 같은 것이 느껴져 피식 웃음이 난다.

08-07
08-09

이성철(36세), 금속공예가
금속을 다루는 사람치고 금속 액세서리나 소품이 많지 않다. 유일하게 손목에 늘 차는 것이 아버지의 오메가 예물시계다. 이 시계를 처음 만난 건 몇 년 전 부모님의 장롱에서다. 부모님이 결혼 예물로 마련한 한 쌍의 손목시계를 보며 무언가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 내 나이보다 더 청춘이던, 막 신혼살림을 시작하던 그 시절 부모님의 시간이 그 안에 담겨 있는 것 같아서. 아버지는 이 시계를 내가 결혼하면 나와 신부에게 함께 줄 생각이라고 하셨지만, 그게 언제일지 기약이 없어 내가 먼저 받아 사용하고 있다. 아버지의 시계로 흘러가는 시간이 좀 더 느린 것 같은 느낌은 기분 탓일까? 부모님의 시간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시계를 미래의 내 아이에게도 물려주고 싶다.

임학현(43세), 포토그래퍼
아버지는 누가 봐도 멋쟁이셨다. 아버지의 옷장은 늘 말끔했다. 단정한 슈트와 셔츠, 다양한 종류의 넥타이, 그리고 신발장에는 잘 관리한 구두가 가득했다. 아버지는 가끔 옷장 문을 열고 “내일은 어떤 옷을 입을까? 무슨 넥타이를 해야 잘 어울릴까?”하며 우리 삼 남매에게 물으시곤 했다. 멋쟁이 아버지에 비해 나는 언제나 그저 편한 캐주얼 차림이었다. 가끔 중요한 일이 있거나 격식 있는 자리에 갈 땐 당신의 옷을 꺼내 직접 스타일링해주셨다. 이 구두는 동생이 외국 출장길에 선물로 사다 드린 페라가모 구두인데 당신 취향에 맞았는지 생전에 무척 아끼셨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의 세월만큼 구두에도 흠집이 생기고 주름 또한 깊어졌지만 아버지처럼 점잖은 멋이 나는 구두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3년 뒤에 결혼을 하게 되었다. 인생의 새로운 출발길을 아버지와 함께 걷고 싶어 아버지의 구두를 신고 결혼식에 입장했다. 늘 염려 많았던 큰아들이 반려자를 만나 행복한 길을 걷기 시작했다고 말씀드리고 싶었다.

0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