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ossibility of Leaving

떠날 수 있다는 가능성

계간지 <황해문화>, 개마고원, 창비 출판사를 거친 13년 차 편집자 박대우는 인문서 만드는 일이 좋았다. 어려운 철학서를 맡아 지적 호기심을 좇을 땐 스스로를 위한 대학원 공부를 한 것이나 다름없다 생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몸은 다른 반응을 보였다. 사나흘 동안 한숨도 자지 못하는 날이 이어졌다. 해내야만 한다는 부담감,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 일 못한다는 자괴감, 패기 넘치는 타인과의 비교 등이 켜켜이 쌓여 불면증으로 나타났다.
버티고 버티다 “정말 나는 이 일을 못 하겠다”고 손을 놓을 때 강원도 고성 아야진해변이 눈에 들어왔다. 머리가 뜨거워지면 언제든 바다로 뛰어들 수 있는 어촌으로 이주한 지 10개월, 그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문제의 원인과 이별 중이다. “못하겠습니다”,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걸 과도하게 어려워하지 않으려 한다. 원하면 언제든 그만두고 다른 방식으로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기억한다. ‘잠시 멈춤’을 포기로 여기지 않는다.
우리는 대부분 거주지, 직업, 소속 등 삶의 여러 영역을 변치 않는 고정값에 묶어두고 불확실성을 줄이려 애쓴다. 하지만 확실성으로만 가득 찬 세계 역시 우리 몸을 굳게 만든다. 이 일 아니어도, 여기 아니어도 삶이 이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머리에서 날릴 때 삶은 갑갑한 버티기 싸움이 된다. 다른 가능성에 대한 상상 허락하기, 때론 그것으로 충분할 때가 있다.

09-10-01

어렵게 퇴사를 결정하고 고성으로 이주해 1인 출판사 ‘온다프레스’를 차리고 다시 출판 일로 돌아왔습니다.
‘어차피 같은 일을 할 거면 그냥 큰 출판사 다닐 걸 그랬나?’란 생각이 들지는 않나요?

외형적으로는 같은 일이지만 질적으로는 크게 다릅니다. 출판편집자 일의 큰 장점이자 단점이 코디네이터 역할을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저자, 번역가,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 사진가 등 여러 사람 사이에서 조율하는 역할이 재미있기도 하지만, 무엇 하나가 어그러지면 스트레스가 그만큼 커요. 회사에 다닐 때는 코디네이팅 업무를 제 의지대로 통제할 수 없었습니다. 회사가 꼭 해야 한다고 하면 억지로라도 해내야 했죠. 지금은 제가 대표이니 해보다가 수틀리면 그냥 안하면 됩니다.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게 처음에는 너무 어려웠는데, 한번 해보니 정말 후련하더라고요. 불편함을 참아가면서 억지로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니 출판 일 본연의 재미를 다시금 느꼈고요.

직장 생활하면서 어떤 순간에 퇴사 충동을 강하게 느꼈나요?
저는 편집자 4년 차 무렵에 물리적, 심리적으로 그 무엇도 회사에 귀의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어요. 친구 편집자가 해준 이야기 때문이었습니다. 친구 회사의 팀장님이 어느 날 창문을 닦다가 퇴사를 했다는 거예요. 멋있게 느껴지더라고요. 본인이 아니라고 생각할 때 아무 미련 없이 나가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그래서 회사 책상에 짐을 거의 두지 않고 언제든 떠날 사람처럼 굴었습니다. 청소 아주머니가 의아하게 여기실 정도였죠. 하지만 그건 단지 제스처에 불과했어요. 제가 심리적으로 회사에 너무나 밀착되어 있었다는 걸 떠나보니 알겠더라고요. 예전 회사에서 맡은 작업이 끝나지 않아 인수인계받은 후배에게 연락할 일이 종종 생기고, 예전 사무실에 갈 일도 있는데, 그때마다 속이 막 끓어요. 내가 왜 이곳을 나왔을까 복잡해집니다. 찌질함의 극치죠.(웃음) 일 자체에서는 재미를 많이 느꼈는데,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잘 풀지 못했어요. 연차가 쌓이고 부서장이 되면 실무가 아니라 관리를 하게 돼요. 저는 코디네이팅 업무만 하는 게 마뜩찮아서 상사분들께 승진 안 해도 괜찮고 월급 안 올려줘도 괜찮으니 현업에서 10년만 더 있게 해달라고 진지하게 요청드린 적도 있어요. 하지만 사회에서는 윗자리로 올라가려는 욕구가 없는 사람을 루저처럼 보기도 해요. 그런 부분에서 스스로 주눅이 많이 든 것 같아요. ‘아, 나는 패기도 없고 야망도 없는데, 이곳에서 굳이 더 있어야 할까’ 생각했죠.

09-10-09

퇴사 결정을 내리기까지 망설인 이유는 무엇인가요?
퇴사를 망설인 이유 중 하나는 제가 좋아하는 작가 프리모 레비가 공장노동자로 30년간 일했다는 사실 때문이었어요. 인세 수입만으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었는데도 공장노동자로 계속 일했다는 사실이 저의 퇴사 결정을 주저하게 만든 것이지요. 프리모 레비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라 책을 자주 읽었는데, “화학자로 살아간다는 것과 작가로 살아간다는 것 사이에는 모순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상호 보완이 되지요” 같은 문장을 읽을 때마다 감정이 복잡해졌어요. 반면 레비는 퇴직 후 “직장이라는 제1의 영혼을 포기했을 때 너무나 안도했다”, “모험을 하고 싶은 사람은 너무 오래 기다려서는 안 된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어쨌든 30년은 일해본 뒤 얻은 통찰이니까 나는 아직 이르다 생각한 것 같아요. 그렇게 결정의 시간을 미루다 결국 자존감이 바닥을 쳤고, ‘나는 이 일을 안 하겠다’가 아니라 ‘나는 이 일을 도저히 못 하겠다’의 상태가 되어서 그만두었죠.

퇴사와 동시에 서울을 떠나 고성으로 이주했어요.
아내도 출판편집자인데, 일정한 곳에 자리 잡고 사는 정주 개념이 없는 사람이에요. 우리는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죠. 딸 연이가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 그러니까 제가 창비 출판사를 열심히 다니던 시절에 아내가 고성 아야진초등학교 근처로 이사 가고 싶다고 한 적이 있어요. 5년 전에 아야진초등학교가 혁신 학교로 선정되어 발도르프 교육에 뜻이 있는 선생님들이 모여서 여러 재미난 일을 벌인 적이 있거든요. 주말부부를 해서라도 아이를 아야진초등학교에 입학시키고 싶다고 했는데, 당시에는 제 직장 문제로 무산됐어요. 지난해 퇴사하기로 결심했을 때 주말에 가족과 함께 고성에 와보니 정말 좋더라고요. 교실 분위기가 그때와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학교는 여전히 기품 있고, 무엇보다 미세먼지가 수도권에 비하면 훨씬 양호했어요. 공기 질은 저희 가족에겐 정착 결심의 30% 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주요 요인이었어요.

정착 초기, 예상치 못한 어려움은 없었나요?
처음에는 출판 일을 할 생각이 없어서 매일 교차로, 벼룩시장에 나오는 일자리를 찾아봤어요. 이 근처에는 황태 덕장 일이나 명태 할복해서 진공포장하는 일이 많거든요. 추운 겨울 새벽에 자전거 타고 덕장 바로 앞까지 가본 적이 있어요. 너무나 추운 겨울에 고무장갑 하나만 끼고 찬물에 손 담그며 일하는 모습을 보는데 자신이 없어지더라고요. 그러잖아도 겨울에 감기를 달고 사는데, 빌빌거리다가 욕먹고 그만둘 것 같아서 조용히 집으로 돌아왔어요. 그 뒤로 거의 4~5개월을 교차로 보면서 지냈어요. 그러다 지자체의 창업 지원 공고를 발견하고 기획안을 냈는데, 그게 통과돼 온다프레스를 창업할 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었죠. 생계 문제로 곤란하던 시기에 심리적으로 고통스러웠는데, 놀랐던 점은 회사 다닐 때의 심적 고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었어요. 어차피 이래도 저래도 스트레스 받는 거라면 그걸 견디기 가장 좋은 환경으로 이주한 결정은 잘한 것이다 싶었어요.

퇴사 후 알게 된 몰랐던 자기 모습이 있나요?
저는 회사 다니며 너무 자괴감에 시달렸어요. 성격도 좀 유별나고, 사교적이지 못하고, 일 못하고... 이런 식으로 자기 평가를 했는데, 고성에 와서 제 생각이 틀렸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온다프레스를 차리고 급하게 예전 회사 편집자 후배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일이 있었는데, 다들 자기 일처럼 너무 잘해주는 거예요. 제가 미안해서 특산물 젓갈을 챙겨 보내니 왜 이런 걸 보내냐고, 제게 받은 게 너무 많아서 고마웠다고, 꼭 갚고 싶었다고 말하더라고요. 저는 제 능력치가 너무 떨어지고 회사에서 그다지 존재감 있는 사람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나를 잘 몰랐구나 싶었어요. ‘그렇다면 나는 왜 그리 나를 낮췄을까?’ 하는 질문이 그제야 들더라고요. 고성에 내려와 빈둥빈둥하는 시간을 보내고 나니까 스스로를 오해할 수도 있고, 때로는 자기 진가를 늦게 깨달을 수도 있겠구나 싶어요.

09-10-11-main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쉬이 생각하지만 그게 오해일 때도 있죠.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정말 제대로 알아야 해요. 저는 제가 아주 독립적인 사람인 줄 알았어요. 부모님, 친지 등 친족 체계와 얼마든지 떨어져 지낼 수 있는 훌륭한 독립적 개체라고 굳게 믿었죠. 그런데 퇴사하고 고성에 내려간다는 이야기를 죽어도 어머니께 못 하겠더라고요. 결국 아내가 이야기해줬어요. 저희 집은 명절이 되면 20~30명 씩 와서 절하고 차례 지내거든요. 제가 집안의 장손이라 어르신들 기대가 크기도 했고요. 저는 그런 사실과 아무 상관 없이 “퇴사하고 이렇게 살겠습니다” 말하고 내려올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닥치니 그게 안 되더라고요. 스스로 너무 한심했어요. 또 인문서를 만들다 보니 다방면으로 깨어 있다고 자신하는 편인데요, 머리로는 ‘책임감 있는 아빠라서 퇴사 고민이 무겁다’는 식의 이야기가 선을 넘지 못하는 남자들의 주된 알리바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현실에서는 저 역시 그런 생계 부담에 대한 책임감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지 못했다는 걸 깨달아요. 남성 단독 생계 부양자 모델 앞에서 단호하게 굴고 싶지만, 여전히 불안한 게 사실이에요. 이렇게 퇴사 과정에서 자기 설득, 주변 설득 과정을 거치다 보면 몰랐던 자기 모습을 많이 발견하게 돼요.

퇴사 전에도 일에만 함몰된 분은 아니었죠. 목공, 커피, 독일어 공부 등 다양한 취미 활동을 하는데, 일 외에 삶의 다른 영역을 가꾸는 시간이 중요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저는 회사 다닐 때도 언제나 빨리 집에 가고 싶어 했어요. 저녁 시간을 확보해 집 가꾸는 데 썼지요.책장 닦아보기도 하고, 버려진 나무를 가져다 베란다에서 목공을 하기도 하고요. 뭘 배우는 걸 좋아해요. 제가 정말 존경하는 선배가 계셨어요. 공공연히 저의 롤모델이라고 말하는 분이었죠. 그분의 지성, 정치적 올바름, 인성 모든 게 존경스러웠지만 일상의 패턴만큼은 닮고 싶지 않았어요. 매일 늦게까지 야근하고 아침에 제일 일찍 출근하고, 눈은 늘 충혈되어 있고.... 제가 열심히 일만 하면 저렇게 되겠구나 싶었어요. 가끔씩 상갓집에서 또래 친구들 만나면 다들 참 열심히 사는 것 같아요. 똑같이 양복 입고 쪼르르 앉아서 주식 이야기 같은 걸 하죠. 학교 다닐 때 기타 좋아하던 친구에게 “너 기타 치던 거 계속 치냐?” 물으면 “야, 기타 버린 지가 언젠데” 답해요. 골프, 새벽 수영, 영어 수업도 취미가 될 수 있겠지만, 자기 계발 영역을 넘어서는 취미를 가진 사람을 만나기 점점 더 어려워져요. 저는 목적 의식에 사로잡히지 않은 활동 시간이 무척 중요한 사람이에요. 언제든 내킬 때 일을 잠시 접고 빠져들 수 있는 선택지를 많이 가질수록 마음이 조금 더 여유로워지는 것 같아요.

탈서울 10개월 차, 일의 의미가 다르게 보이나요?
일 외에 삶의 다른 영역을 가꾸는 시간도 무척 중요하고, 일 아닌 것에서 즐거움을 찾으려는 태도 또한 물론 중요해요. 하지만 이 모든 건 일을 잘 다져놓아야 가능한 것 같아요. 일이 흔들리면 돈 많은 한량이 아닌 이상 괴로울 것 같거든요. 일단 일을 잘해야겠죠. 언제든 그만둘 수 있다는 가능성을 잊지 않으면서요.

09-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