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Is Alternative Education?

대안교육이 무엇인가요?

‘교육’에서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그 길을 선택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대안학교’에 관심이 있는 부모라면 왜 지금 우리가
‘대안교육’을 말하는지부터 짚어볼 필요가 있다.


며칠 전 후배가 물었다. “대안교육을 전공하신다니 도대체 대안교육이 뭐예요? 저는 그거 좀 부정적으로 들리던데....” 영어 이름이 붙은 어느 학교에 자녀를 보내는 또 다른 후배가 옆에서 발끈했다. “무슨 소리야? 대안교육이 요즘 대세야. 있는 집에선 다들 대안학교에 보낸다고.” 어이쿠, 도대체 대안교육이 무엇이란 말인가?


사실 ‘대안’이란 텅 비어 있는 단어다. 그 자체로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대안(代案)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어떤 안을 대신하는 안”이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사전적으로 말하면 대안교육은 ‘어떤 교육을 대신하는 교육’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도대체 우리는 ‘어떤 교육’ 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그것을 무엇으로 어떻게 대신하자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 결과 ‘내 맘대로 내가 하는 것이 바로 대안’이라는 아전인수 격의 주장이 난무한다. 심지어 언론마저도 ‘귀족형 대안학교’ 같은 형용모순을 괘념치 않고 막 쓴다. 이런 소리 없는 아우성 같으니라고.


서구에서는 ‘Alternative Education’이라고 잘 쓰지 않는다. 바로 무엇에 대한 대안이냐, 어떻게 하자는 대안이냐는 질문이 반드시 뒤따라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영영사전에서 Alternative를 찾아보면 그렇게 텅 비어 있지만도 않다. 대안은 근대사회에서 어떤 것의 일상적 종류, 혹은 어떤 일을 하는 일상적 방식과는 다른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대안적 삶의 방식이란 전통적 생활과 일의 방식을 따르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 대신에 ‘교육’을 넣으면 자연스럽게 대안교육의 의미가 완성될 수도 있겠다. 즉, 대안교육이란 전통적인 교육과 그 교육 방법을 따르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전통적인 교육과 그 교육 방법이 무엇이기에 따르지 말자는 것인가? 근대 교육은 ‘학교’라는 교육 대량생산 체제에 맞춰져 있다. 모두가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것을 배워 똑같아져야 한다. 12년의 교육과정이라고 하는 컨베이어 벨트를 거치면 산업사회의 역군이라는 완제품이 되어 나온다. 이는 산업혁명으로 인한 산업사회의 산물이다. 물론 이는 지난 100여 년가량 우리 사회가 요구한 시스템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시대가 변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요즘 유행하는 협박, ‘4 차 산업혁명 시대’가 쓰나미처럼 밀려든다. 개성 있고 독창적인 인재가 필요하다면서 “매일 아침 7시 30분까지 우릴 조그만 교실로 몰아넣고 전국 900만 아이들의 머릿속에 모두 똑같은 것만 집어넣고 있으니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교실이데아’, 서태지, 2007년 발표)라고 할 수밖에. “왜 바꾸진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을까?”라는 질문은 그 자신이 중간에 학교를 때려치운 서태지의 것만은 아니었나 보다. “한국 사회에서 살려면 어쩔 수 없잖아?” 하는 질문에 이미 1990년대 중반부터 지난 20년 넘게 우리 사회에 새로운 학교와 새로운 교육이 가능함을 실천적으로 보여주었으니.


대안교육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유기농에 종종 비유하곤 한다. 우리가 유기농에 다가서는 태도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유기농은 좋은 것이고, 고로 비싼 것이며, 나는 소중하니까 비싸고 좋은 것을 소비해야 한다는 태도가 그 첫 번째다. 앞서 언급한 ‘귀족형 대안학교’ 같은 형용모순도 이런 태도에서 나왔고, 그러므로 비싸다. 한국의 교육은 국제 경쟁력이 뒤떨어져 있으니 보다 국제적인 교육과정을 통해 당신의 자녀를 글로벌 인재로 만들어주겠다는 대안 역시 변종이기는 마찬가지다. SKY 인재가 글로벌 인재로 간판만 바꿔 달았을 뿐 “포장센터로 넘겨 겉보기 좋은 널 만들기 위해 우릴 대학이란 포장지로 멋지게 싸”버린 후 “좀 더 비싼 너로 만들어주겠어. 네 옆에 앉아 있는 그 애보다 더 하나씩 머리를 밟고 올라서도록 해 좀 더 잘난 네가 될 수가 있어”(‘교실이데아’) 라고 현혹해 부모들의 지갑을 열게 만드는 교육 상품인 것에는 별 차이가 없다.


유기농을 대하는 또 다른 접근법은 모든 존재의 가치와 순환을 믿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 어떤 것도 열등하거나 우월하지 않기에 각자의 고유한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고, 각각 서로 연결되어 공생하고자 한다. 따라서 나 혹은 우리의 이익을 위해 파괴적 수단을 이용하지 않고, 최대한 자연 법칙과 섭리에 따라 생산하고 소비하며 다시 그것을 자연으로 돌려보내려는 태도를 지닌다. 이를 철학적으로는 생태주의라 부른다. 대안교육 역시 아이들을 부자유스럽게 특정한 틀에 맞추도록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고유한 존재로서 그 의미를 스스로 밝히고 서로 도우며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찾고자 한다. 그러다 보니 대안교육은 자기 삶과 배움의 주인이 되는 것,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이를 위해서는 머리(지식)만을 강조하는 근대 교육 체제와 달리 머리(지식)와 손발(신체), 그리고 심장(정서)이 함께 자라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자 한다. 그리고 배움의 환경을 ‘학교’, ‘교실’, ‘교과서’라는 인위적 공간이 아니라 우리 삶의 실제 현장들과 밀접하게 연계하고자 한다. 그 가장 극단적 형태는 결국 학교 자체를 해체하는, 이른바 홈스쿨링이다. (개인적으로는 그런 의미에서 홈스쿨링은 월드스쿨링으로 불러야 맞다고 본다. 학교를 해체한 후 고작 학교보다 더 좁은 집 안에 다시 학교를 짓는 것이어서야 되겠는가?)


이를 실천하려니 국가 주도의 공교육 체제에서는 제도적 한계가 너무 많아 아예 제도 밖에서 학교를 만든 것이 이른바 비인가 대안학교다. 물론 모든 대안학교가 비인가인 것은 아니다. 대안교육의 교육 혁신적 가치를 높게 평가한 교육 당국이 제도를 만든 두 가지 형태가 ‘대안교육특성화학교(43교)’와 그 밖의 대안학교(41교)다. 물론 인가 대안학교는 여전히 이런저런 제도적 틀 안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다보니 비인가 대안학교의 수가 인가 대안학교의 몇 배에 달한다. 비인가 대안학교의 경우 학력 인정이 되지 않아 필요한 경우 검정고시를 통과해야 하지만, 검정고시 출신에 대한 편견이 이전에 비해 많이 사라진 상황이기 때문에 그다지 큰 문제로 여기지 않는 분위기다. 물론 인가 대안학교의 경우 상당 부분 국가의 교육 지원이 있기 때문에 학부모 부담이 적은 반면, 비인가 대안학교는 교사와 학부모의 힘만으로 꾸려가야 하기에 상당한 부담과 희생이 따른다. 다만 이를 단순히 ‘수익자 부담’의 차원이 아니라 교육 공동체의 참여와 분담으로 접근한다는 내부적 합의는 중요하다. 최근의 정책적 분위기는 대안교육을 보다 폭넓게 제도적으로 인정하고, 미약하게나마 지원을 늘려가는 추세다. 비인가 대안학교에도 조금씩 혜택이 늘어가고 있기는 하다.


공교육 체제를 한꺼번에 혁신하기 어렵다 보니 학교교육에 잘 순응하거나 적응하지 않는 아이들이 대안학교를 먼저 찾게 되고, 이 때문에 대안교육은 마치 부적응아 내지는 문제아 집합소라는 부정적 이미지도 갖게 되었다. 학교제도에는 아무 문제가 없으며, 문제는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있다고 보는 태도가 바탕에 깔려 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한국 교육이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비정상적인 사교육을 양산한 채 변화하지 않고 있다는 비판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니 진짜 문제는 아이들이 아니라 학교에 있다. ‘19세기 학교에서 20 세기 교사들이 21세기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웃픈 현실은 이제 아이들을 학교에 맞출 것이 아니라, 학교를 아이들에게 맞춰 바꿔야 한다는 요구를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오늘의 아이를 어제처럼 가르치는 것은 아이들의 미래를 빼앗는 것이다.” 존 듀이라는 교육학자가 이미 20세기 초에 한 이야기다. 그러므로 대안교육은 새로운 사회를 향한 미래 교육일 수밖에 없다.

하태욱

런던 대학교에서 대안교육을 공부했고, 건신대 대안교육학과 주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대안교육과 마을 공동체 등을 연구하며 대안교육의 세계적 연대와 소통을 꿈꾼다. ‘아이 주도 육아’의 중요성을 다룬 《남들처럼 육아하지 않습니다》를 썼고, 공저한 책으로 《교사, 대안을 길을 묻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