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My Father Left Me

아버지가 내게 남긴 몇 가지

살면서 한 번도 유산 遺産에 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면 아버지가 내게 남긴 것은 먼저 간 당신의 의지가 아니다.
아버지를 향한 각자의 기억이다.

아버지가 내게 남긴 것들을 생각해보니 아득하고 막막하다. 너무 익숙한 물건인데, 대뜸 작동법이 안 떠오를 때의 난감함이랄까. 아버지의 존재가 그렇다. 자식이라는 이름이 부여하는 어쩔 수 없는 버거움이 있다. 그 탓에 너무 무거운 글이 되면 어떡하나, 고민하면서 글을 꺼내보려 한다.

04-01

아버지는 생각보다 너무 일찍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떠나던 해, 나는 요즘 말로 ‘취준생’이었다. 취업 준비를 하던 공부방의 자리가 하나둘 비어갔다. 남은 자들끼리 버티던 늦은 밤이면 먼저 자리를 잡아 떠난 이들의 빈자리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그날은 특히 더 외로웠다. 늦가을을 지나는 찬 바람이 불고 있었다. 나도 취업 문을 어찌어찌 통과해 최종 합격 여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와 달리 잠을 설친 날 새벽, 엄마가 아닌 친척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내용은 아주 짧았다.
“한번 고향에 내려와야겠다.”

친척은 통화에서 아버지와 관련한 어떤 얘기도 꺼내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지금 바쁘니 나중에 시간 나면 갈게요”라고 습관처럼 내뱉던 자식의 변명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어떤 불안함을 안고 고향행 고속버스에 올랐다. 그렇게 아버지를 떠나보냈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작별의 시간이 있다. 사람들은 작별 연습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같은 말이 어느 때는 전혀 작동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모든 작별에 연습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1
병원에 도착하고, 누구도 아버지가 떠났다는 말을 해주지 않았다. 그저 아는 이의 침묵하는 발걸음이, 황망한 눈빛이, 어머니의 핏기 가신 얼굴이 모든 걸 알려주었다. 이상하게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묵묵히 장례 준비를 하던 공간을 머뭇거리다, 밖에 나와 담배를 몇 개비 피웠다. 왈칵 눈물이 쏟아진 건 발인 날이었다. 영정 사진을 들고 장례 차에 오르면서 시작된 눈물은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나는 그날 알았다. 사람이 쏟는 눈물의 양은 가늠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는 것을. 아버지와 작별 인사는 그 일주일 전에 나눴다.
아버지가 폐렴으로 많이 편찮으시다는 말에 병문안을 다녀왔다. 아버지의 원래 마른 몸은 혹독한 병마와 싸우는 탓에 깡말라 있었다. 호흡기에 의지하느라 대화를 나눌 상황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글로 물으셨다.

“취직은 할 것 같냐?”
“네, 취직했어요.”(최종 합격 통보를 받지 못했으나, 아픈 아버지를 안심시킬 요량으로 한 대답이었다)
“잘됐다.”

어쩌면 생의 마지막에 선 이가 묻는 말이 자식의 취직 여부라니. 먼저 떠나는 이는 자신의 지난 삶을 복기하는 것보다 남은 이의 앞날이 더 걱정인 걸까. 아버지는 기력 없는 손으로 뭔가를 적어 자식에게 건네셨다. 두 마디 문장이었다.
“건강해라.” “공부해라.” 아버지의 유언이었다.

#2
아버지를 떠올리면 대부분 오래된 눈물과 작은 농담들이 함께한다. 이제부터는 그 작은 농담에 관한 얘기다. ‘건강해라’라는 유언 탓일까? 자식은 제 몸을 챙기는 데 유난을 떨 때가있다.예를 들면 몸에 좋다는 것들, 무슨 보양식이라든가 어디에 좋다는 영양제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한 번쯤은 다 섭식하는 몸이 됐다. 그게 뭐든 몸에 좋다고 하면 일단 입에 집어넣는 모습을 보며, 아내는 이렇게 타박한다.

“아무튼 지 몸 챙기는 건 잘해.”

그렇다고 내몸이 섭식의 혜택을 받는 건 아니다. 40대를 넘어선 체력은 허덕일 때가 많다. 매일 아침이면 만성피로가 남의 말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한다. 특히 잇몸은 부실해 벌써 임플란트를 하나 심었고, 불행히도 흔들리는 치아 2개는 임플란트 후보가 됐다. 치과에 들르면 담당 의사가 촬영한 엑스레이를 보며 흠칫 놀란다.
“아니, 지금 나이에 벌써 이러면 안 되는데....”
사람 건강은 역시 타고난 게 반이다. 아쉽게도 아버지의 유언 하나 못 지키는 자식의 몸이라니.
‘공부해라’라는 유언은 또 어떤가.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나서는 그럴듯하게 공부란 걸 해본 적이 없다. 공부하지 않아서 맞이하는 40대의 현실은 짐작하듯이 초라하다. 갈수록 텅 비어가는 머리와 직장에서 맞이하는 밥벌이의 불안함. 거기 이렇게 나만의 위로를 덧붙일 뿐이다.
“물론 나도 공부란 걸 하고 있잖아. 나름의 ‘인생 공부’를 계속하고 있으니까.”
다행히 아직 K.O 펀치는 맞지 않았다. 그런데 복싱을 조금 해본 사람은 안다. 잔펀치를 계속 맞다가 그로기 상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매일 아침 맞이하는 만성피로는 어쩌면 잔펀치의 후유증일지도 모른다.
사는 게 답답할 때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러면 아버지가 느껴져 아버지의 이름을 혼자 불러보곤 한다. 그리고 이런 농담을 하나 건네며 슬쩍 웃는다.
“아이고, 아버지. 물려주실 거면 꿈에 나타나 로또 숫자나 한번 알려주시지.”
돌아보면 아버지는 한 번도 복권을 사신 적이 없다. 또 아버지가 쓰시던 단어 중 운이나 횡재에 기댄 말씀이 하나도 없다. 아버지나 자식이나 ‘가난한 아빠’들이다. 그럴 때는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한 구절에 기대어본다. 그러다 아내의 말을 듣고 정신이 퍼뜩 든다.
“그래서 우리 평생 내 집 하나는 살 수 있는 거야?”
아버지는 작은 집이라도 사셨으니. 이 세상 자식들은 그 아버지가 남긴 것을 다 잘 배우거나 이루지 못하고 살아간다.

#3
아버지와의 추억이라면 당연 야구다. 올해 기아 타이거즈가 코리안 시리즈 우승을 거머쥐었다. 기분이 좋았다. 나는 왕년에 “해태 타이거즈가 말이야...”로 시작하는, 영원한 해태 팬 중 한 명이다. 어느 무더운 여름의 프로야구였다. 초등학생쯤 되었을까, 일찍 일을 마친 아버지와 가벼운 점심을 먹었다. 물에 만 밥에 아삭이고추가 한 끼였다. 따가운 여름 햇볕이 마당의 강아지까지 축 늘어지게 만들던 날이었다. 툇마루에서 아버지의 팔베개를 하고 함께 누웠다. 라디오에서는 야구 중계가 한창이었다. 왕년의 해태 타이거즈는 빨간 유니폼으로 유명했다. 그 컬러만큼이나 여름의 야구 중계도 뜨거웠다. 라디오에서는 야구팬을 홀리는 아나운서의 들뜬 목소리가 사람을 흥분시켰다. “1점 차로 뒤진 9회 말 투 아웃입니다. 2루에는 역전 주자가 나간 상황. 타석에는 홈런 타자 김봉연 선수가 들어섰습니다. 첫 번째는 헛스윙, 두 번째는 3루 외야를 넘어가는 큼지막한 파울볼. 마지막 투구를 앞두고 관중석에는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있습니다.” “네, 상대 투수도 무슨 공을 던질지 고민하는 눈치군요.”
“자, 쳤습니다. 잘 맞은 타구. 쭉쭉 뻗어갑니다. 아, 아, 역전 투런 홈런이냐.”
물론, 이 야구 해설은 내 상상에 의한 것이다. 그해 여름 아버지와 함께 청취하던 프로야구는 이런 뜨거움을 전달하고 있었다. 승패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라디오를 듣다 낮잠이 들고, 깨어나면 어느 팀은 이겼고, 어느 팀은 졌다. 무엇보다 아버지의 팔베개를 하고 누웠던 무더운 여름날의 느긋한 시간이 좋았다.
야구팬들 사이에 유명한 말들이 있다. 예를 들면 “인생은 9회 말 투 아웃부터”라거나 “경기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같은. 인생을 야구에 빗댄 근사한 말들이다. 그해 여름, 아버지가 내게 해준 말은 그런 근사한 얘기는 아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책임질 일이 많다는 거야. 자식 하나 키우기도 힘들고. 그런 날엔 아등바등 버티며 살지 마라. 가끔씩 자식 팔베개를 하고 누워서 한숨기분좋게자고일어나라.특히뜨거운날에는 조급해하지 말고 잠시 쉬어 가라.”

#4
아버지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장면이 있다. 어느 아침, 면도를 마친 아버지의 턱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흰 수건으로 지혈을 하는데도 피는 쉽게 멈추지 않았다. 어린 자식이 보기엔 소스라칠 일인데, 아버지는 대수롭지 않은 일상처럼 보였다. 아버지는 일회용 면도기를 사용하셨다. 한 번 쓰고 버리는 게 아니라 날이 무뎌질 때까지 쓰곤 하셨다. 상처 난 아침을 맞은 건 그 탓이었다. 어른이 된 나도 면도를 하면서 몇 번 베인 적이 있다. 그래서 한때 전기면도기를 사용했지만, 날 면도기만큼 상쾌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때 내게 말씀하셨다.
“수염은 매일 자란다. 자주 오래 쓰는 것일수록 좋은 도구를 사용해라.”
조금 근사하게 표현하면 이렇다.
“인생의 작은 상처들은 금방 아문다. 그러니 작은 상처들에 연연하며 살지 마라.”
세상 자식들은 아버지라는 이름에서 그만큼의 사연과 추억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 각자의 이야기만큼 아버지에 대한 다양한 감정을 담고 살아갈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역시 세상 아버지의 뒤를 이어, 또 각자의 아버지가 되어 살아가고 있을 테니까. 나의 이야기가 각자 아버지의 이야기를 두드리길 바랄 뿐이다.

A Con ersation with riends on hat My ather eft Me

‘아버지가 내게 남긴 것’을 주제로 친구들과 나눈 대화

다들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 하나둘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 시대 아버지에 대한 적절한 부채 의식과 각자 아버지로 살아가는 지금을 담아서. 친구들의 이야기 중에 이 말이 가장 와닿았다.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면, 우리 술 한잔해야 하는 거 아냐?”

1 | 아버지의 삶은 성실 그 자체였어요. 아버지가 한 번도 손에서 일을 놓은 걸 본 적이 없으니까. 이제는 여유를 누려도 될 만한데, 여전히 학원 차량 운전을 하고 있어요. 그런 아버지의 성실에 눈물이 나지만,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아. 자식 키우느라 한 번도 맘 편히 살지 못한 아버지의 성실이 있다면, 나는 그 반대편에서 즐기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죠. 일종의 ‘유희적인 성실’이라고 할까.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이잖아요.


- 하루 8시간 일하는 마흔의 노동자

2 | 너도 내 꿈이 뭔 줄 알잖아. 대기업에 다니고 사업도 잘됐지만, 돈을 잘 번다고 다 행복한 건 아니더라. 오래전부터 배우를 해보고 싶었어. 우스운 얘기지만 화면발, 무대발 받으려고 얼굴도 좀 고쳤잖아. 마흔 넘어서 배우를 하려니 처음엔 막막하더라. 잘하는 사람들을 보면 내가 얼마나 초라한지 몰라. 그래도 작은 연극 무대를 생각하며 목이 쉬도록 연습한 날은 너무 행복한 거야. 역시 사람은 꿈을 먹고 살아야 해. 꿈이 있다면 실패하더라도 한 번쯤은 도전해봐야지. 돌아보면, 아버지가 내게 들려준 말이 그랬어. “빈말하는 인생을 살지 마라”고 하셨거든.


- 마흔 중반의 단역 배우

3 | 흔히들 사업하는 집안의 가족은 맘고생이 심하다고 하잖아요. 사업의 굴곡에 따라 자식의 삶이 하이클래스와 바닥을 오갔어요.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집 안 곳곳에 압류 딱지가 붙은 날을 잊기 힘들어요. 그런데 사업이 잘나갈 때나, 압류 딱지가 붙었을 때나 아버지는 한결같았어요. “괜찮아. 다 잘될 거야. 다시 일어설 거야.”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아버지의 말처럼 다시 정상으로 되돌아와 있곤 했죠. 그렇게 살아가는 태도를 배운 것 같아요. ‘어느 순간에나 괜찮다’를 배운 거죠.


- 서른 중반의 사진작가

4 | “내가 너를 우예 키웠는데, 나한테 이카노.” 우리 아버지는 경상도 출신에 군인이었어요. 얼마나 권위적이고 보수적인지 짐작하기 힘들걸요. 내 청춘기는 ‘권위로부터의 탈출’을 생각했고, 반항을 했어요. 성인이 되면서 아버지와 대판 싸우고는 “내는 아버지처럼 안 살 낍니다”라고 선언했지요. 나는 그저 자유분방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사륜구동의 오프로드 차를 몰고 라이딩과 캠핑을 즐기는 것, 스킨스쿠버와 가죽공예 등은 내가 행복하기 위한 취미들이죠. 무엇보다 제 품에서 자식을 키웠다는 보상 심리를 갖지 않으려고 해요. 그래서 아들에게는 종종 이런 말을 해줘요. “누구의 것이 아닌 네 인생이니 알아서 행복하게 사는 법을 배워라.”


- 제멋대로 즐기며 사는 방송국 PD

5 | 형, 우리 아버지는 대인배셨어. 집에는 늘 아버지의 화통한 기질을 따르는 친구들과 후배들로 북적였거든. 아버지는 그들에게 베푸는 게 인생의 낙이셨고, 그 탓에 어머니가 고생을 하셨지. 내가 아버지의 기질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 같아. 사람들 만나고, 사람들 챙기는 게 좋으니까. 돌아보면, 아버지는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대농장’을 이루셨던 것 같아. 그런데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비슷해. 다양한 재능과 끼 있는 친구들을 끌어들여서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으니까. 글쎄, 이렇게 사람들을 연결하고 베풀면 뭔가 근사한 작품 하나는 나오지 않을까?


- 누구보다 왕성한 체력을 지닌 콘텐츠 기획자

6 | 아버지를 생각하면 몸이 약하고 일찍 돌아가셔서 안됐다는 마음이 커요. 한편으로 고지식한 인생을 사셨는데, 마음에 변사는 없었어요. 가족을 대하고, 일을 하는 데 늘 한결같은 태도였으니까. 허튼 일과 타협하지 않는, 어쩌면 클래식한 인생을 사셨다고 할까. 그런데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면, 우리 술 한잔해야 하는 거 아냐?


- 사회적 기업가로 활동 중인 후배

04-02

강승민

잡지와 출판 에디터로 인생 전반전을 살았다. 후반전에는 뭘 해야 하나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중이다.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살고 싶으나, 감당 못 할 팔자라는 것쯤은 안다. 커가는 딸이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에서 살아가기를... 지금은 그걸로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