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o are Modern Fathers?

‘모던파더’ 그대는 누구인가

결혼과 출산을 꺼리는 시대의 가장, 모순투성인
현대사회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고충을 안고 살아가는 아버지.
우리는 그들을 모던파더라고 부른다.

최근 40대의 삶을 조망해달라는 원고 청탁을 자주 받는다. 왜 이 주제여야 하는지 부연 설명을 들어보면 단순히 생애사적 중년에 대한 관심이 아니다. 한국의 아저씨들이 겪는 고달픔에는 이전과는 다른 무게감이 있는데, 세상은 이들을 ‘청년 다음의 중년’, ‘노년 이전의 중년’이라는 상투적 틀에서만 바라보니 답답해하는 사람이 많다는 거다. 위로랍시고 다가오는 경우도 이들에게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한국 남자들은 청년기를 지난 30대 중반 이후부터 거의 30년간 중년 세대라는 이미지에 갇힌다. 그런데 미디어는 이들을 어깨 축 처진 채 외롭게 걷는, 그러나 우직하게 걷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는 전형적인 아버지 상 像으로만 포장한다. 드라마의 소재로는 좋을지 모르나 현실에서는 가혹한 모델이다. 시대가 어떻게 변했든 가정 꾸리고 사는 남자라면 불평불만은 금물이니, 이 달라진 시대 때문에 힘들어하는 개인의 속은 타들어간다.
더구나 객관적으로 불쌍한 청년 세대들이 존재하니 직장 다니는 30~40대들은 입 다물고 살 수밖에 없다. 대부분이 죽도록 노력해서 겨우 평범한 삶 언저리에 다다랐지만, 청년들을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3포 세대라 부르는 지경에 감히! 결혼까지 했다는 건 ‘그래도 형편이 나은 축’으로 평가받기 때문이다. 무려! 자녀가 있다면 ‘복받은 자’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현실에 감사할 줄 모르면 이 땅의 젊은이들에 대한 최소한의 연민조차 없는 나쁜 어른으로 취급받는다. 정말로 감사할 형편이라면 무엇이 문제겠는가. 별 고민거리도 아니었던 취업, 결혼, 출산을 작금에는 마치 대단한 선택처럼 여긴다는 것은 이들의 삶, 그러니까 결혼과 출산을 포함한 일상의 유지가 쉽지 않다는 말이다. 20여 년 전만 해도 결혼하지 않은 ‘미혼자’에게 주변 친구들은 얼른 미혼을 청산하라고 채근했다. 하지만 ‘비혼자’라는 말이 익숙해져가는 지금 시대에는 마치 기혼 상태가 정상인 양 전제된 질문은 금물이다. 오히려 젊은 아빠들은 “나도 결혼하지 않았으면 여유 있는 삶을 살고 있겠지?”라면서 자유인을 부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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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버지처럼 살 수 없는 새로운 중년
안정적으로 산다는 건 살면서 마주하는 여러 돌덩어리가 어느 순간부터 슬기롭게 처리됨을 느끼는 것이기도 하다. 연륜이 생기면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낮아지니 안정감은 당연히 높아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경지에 오르는 게 쉽지 않은 세상이다. 주변에서는 자신을 중년이라고 하는데 무늬만 어른이니 찝찝하다. 그래서 자기가 어릴 때 위엄 있게 보이던 아버지에게 혹시나 하는 마음에 “힘들다”면서 슬쩍 말을 건넨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에게 비수를 꽂는다.
“너 나이 때는 다 그렇지.” 아버지는 아들이 유난 떤다고 생각한다. 아들은 ‘평범한 중산층’이 되기 위해 지금껏 초인적인 여정을 마다하지 않았는데도 결과가 녹록지 않아 괴로워하는 중이다. 아들은 아버지보다 학력도 학벌도 좋고, 배운 것이 많으니 다재다능하다. 영어 실력은 아버지보다 문법, 회화, 발음 등 모든 면에서 탁월하다. 새로운 기술에 대한 적응도는 하늘과 땅 차이다. 심지어 아버지의 40대 모습보다 훨씬 젊은 40대로 살아간다. 피부도 좋고 옷도 세련되게 입는다. 살얼음판인 직장에서 어떻게든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가혹하게 관리한다. 객관적으로 더 노력했지만, 과거의 아버지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룬 것들이 지금의 아들에게는 오리무중이다. 아버지가 고생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아들은 그저 지금 시대의 ‘생존 공식’이 달라졌음을 이해해주었으면 하고 손을 내밀었을 뿐이다. 야속하다.
“나는 다 했는데 너는 왜 못 하냐.” 아들의 가슴에 비수가 하나 더 날아든다. 아버지는 아들의 결핍이 ‘개인의 나약함’에 있다고 ‘확인하지도 않고 확신’한다. 시대의 비극이다. 물질적. 정신적으로 아들의 완벽한 독립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아버지는 ‘조언 구하는’ 아들을 여전히 어린애 취급한다. 그래서 여섯 살 아이 자전거 가르쳐주듯이 인생을 설명한다. 이렇게 하면 되니 저렇게 하지 말라는 단순한 공식으로 말이다.
설마 그걸 몰라서 이 지경이 되었겠는가. 집값이 살인적인 시대에 착실히 저축한다고 내 집 마련을 하겠는가. 온갖 것을 경쟁하는 시대에 밥 먹여주고 집 앞 보습학원에 보내준다고 자녀 부양이 완성되겠는가. 이제는 줄넘기도, 심지어 ‘창의력’도 학원 가서 배운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창의력 독서 교육’에 돈을 지불하는 시대가 올 줄은 아무도 몰랐다. 어릴 때부터 독서 목록을 체계화해놓으면 추후 수시 전형에 활용할 수 있다는데, 교육의 진정성을 따지는 건 우스운 일이다. 아들은 아버지가 알 수 없는 악재들과 마주하고 있다. 아들은 아버지처럼 강하지 않아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니다. 여전히 낡은 패러다임에 갇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 없는 아버지와 마주하는 게 버거울 수밖에 없다. 아들의 현재를 사회구조적 측면에서 제대로 분석하지 못한 아버지는 “나는 내 아버지도 부양했는데, 너는 나를 부양하지도 않으면서 가족 하나 건사한다고 힘들어하느냐?”는 말을 위로랍시고 한다. 사회가 엉망이니 부자지간의 골마저 깊어간다.

모던파더를 재정의하다
‘모던파더’, ‘영포티’ 등의 말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과거와는 다른 아빠 및 중년을 표현한 말인데, 한 줄로 요약하자면 ‘아재이길 거부하는 사람’ 정도일 것이다. 청년 다음의 삶을 중년이라는 포승줄로 미리 묶지 말고 젊음을 오랫동안 즐기라는 좋은 뜻처럼 보이나, 실상은 중년처럼 보이면 경쟁력을 상실해버리는 참혹한 노동 현실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한’ 사람들의 생존 전략이 상품화되었을 뿐이다. 이런 단어들은 ‘모던’(현대사회)에서 힘들어하는 ‘포티’(40대)를 기만한다. 여기에 포섭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40대가 40대처럼 보인다고’ 조직에서 밀려나가는 건 당연해진다.
모던파더는 말 그대로 모순투성이인 현대사회가 만들어낸 새로운 고충을 안고 살아가는 아버지로 정의해야 한다. 그래야지 그 위 세대가 모던파더를 이해하고 이상한 조언을 하지 않는다. 시대의 다름에 괴로워하는 개인을 존중하는 사회에서 모던파더들은 앞으로 더 힘들어질 것이 역력한 자신의 자녀 세대에게 “그땐 다 그런 거다. 나도 힘들었다”는 실언을 하지 않을 확률이 높아진다. 가족이 진정으로 화목할 가능성도 덩달아 높아지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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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찬호

1978년에 태어났으며, 사회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7년부터 여러 대학과 대학원에서 강의를 하며 학생들을 만났다. 자본주의를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체념적 푸념이 사회에 만연할 때 그 안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삶이 얼마나 괴기해질 수 있는지를 관찰하는 데 관심이 많다. 《대통령을 꿈꾸던 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 남자는 왜 이상해졌을까?》 《진격의 대학교》 등 다수의 저서를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