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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yes — Issue 16. 필환경 생활

낮은 곳을 위한 환경보호

Environmental Conservation for the Lower Ground

  • 2020.04.26
  • writer. 곽재식

지구를 과거의 모습으로 되돌릴 힘이 과연 사람에게 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학교를 졸업한 후 계속 화학업계에서 일해왔다. 2008년부터는 환경 관련 업무가 내 일이었다. 환경에 관한 일만 이렇게 오래 할 줄은 몰랐는데, 어쩌다 보니 10년 넘도록 이쪽 일만 맡고 있다. 그래도 하다 보니 남들보다 잘하는 재주도 몇 가지 정도는 익히게 되었고, 나름대로 이런 식으로 일을 하면 더 좋다든가 하는 식의 경험도 조금은 쌓이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환경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에는 항상 내가 당장 맡은 일과 별로 멀지 않은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사상이나 철학을 언급하면서 환경문제를 이야기하기보다는 당장 내가 월급을 받기 위해 해야 하는 일과 엮여 있는 주제들이 내가 다루는 환경문제였다. 미래 세대를 위한 환경보호 문제도 나에게는 잠시 숨 돌리고 여유롭게 생각해볼 과제가 아니라 생업의 일부인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오늘은 작가로서 글을 쓸 기회를 얻었으니 회사 일과는 관계없는 방향에서 환경보호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만큼은 깔끔하게 해치워야 하는 일거리라는 틀에서 벗어나 환경보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그러므로 오늘의 이야기는 평소 환경문제에 대해 내가 훨씬 더 많이 생각해보는 문제와는 관계가 거의 없는 방향의 생각이다. 그런 만큼 아마도 틀린 부분이 훨씬 많을 것이다. 대신 평소에 조금씩 품고 있던 의심은 조금 지나칠 정도로 자유롭게 풀어놓으려 한다.


지구가 죽어가고 있다고?

나는 사람들 때문에 지구가 죽어가고 있다는 말은 틀렸다고 생각한다. 지구는 그 정도로 죽고 말고 할 것이 아니다. 사람이 아무리 난동을 부리더라도 지구는 멀쩡하다. 정작 지구가 처음 생겨나고 족히 10억 년 즈음의 시간 동안 지구에는 산소조차 충분하지 않았다. 깨끗하고 맑은 물이나 위생적 음식은 고사하고 잠시 마셔볼 산소도 없는 세상이 지구의 처음 본모습이었다는 뜻이다.

사람이 출현한 후 사람의 시각에서 본 지구 모습은 지구가 지금까지 세상에 나타나 있던 기간에 비하면 매우 짧은 시간이다. 46억 년의 지구 역사를 만약 한 해의 길이로 압축해놓는다면 지구에 사람이 나타난 것은 12월, 그것도 그 끄트머리 마지막 즈음이다. 대략 계산해보면 한 해가 끝난다고 제야의 종을 치기 직전 서울 시장과 유명 인사들이 나타나 악수하고 있을 무렵이다. 사람에게 익숙한 지구의 모습은 고작 그 정도밖에 안 된다.

이렇게 살펴보면 사람 때문에 지구가 죽어간다는 생각도 굉장히 잘난 척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사람이 뭘 어떻게 할 수 있길래 사람이 지구를 죽일 수 있다는 말인가? 사람들이 지구를 살려주어야 한다는 말은 어떤 때에는 짐짓 겸손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한편으론 도리어 인류는 너무나 힘이 세고 위대하다는 생각에 깊이 빠져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표현일지도 모른다. 지금 수준의 기술을 지닌 사람은 죽인다 살린다 하는 말에 어울릴 정도로 지구를 바꿀 수는 없다. 다시 지구를 산소가 없고 훨씬 더 뜨거운 과거의 지구로 되돌릴 힘이 사람에게 있는가? 그렇지 않다.

그래도 사람이 생태계를 파괴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냐고 지적해볼 수는 있다. 여기에는 훨씬 더 공감한다. “지구가 죽어가고 있다”는 거창한 표현을 쓰는 것은 지나친 자아도취라고 하겠지만, 사람의 활동 덕분에 사람이 없을 때 보다 훨씬 더 많은 동물과 식물이 그전처럼 못 살게 된 것은 사실이 아니냐는 지적은 좀 더 타당해 보인다.

그렇지만 그 역시 정도의 차이에 관한 문제라는 점을 그냥 넘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없다고 해서 온갖 동물과 식물이 낙원의 풍경처럼 영원히 아름답게 유지되는 것이 지구의 본모습은 아니다. 그런 낙원이 지구의 기본 상태라고 할 수는 없다.

사람들이 주변을 오염시켜 북극곰과 고래의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점은 슬퍼 보인다. 그런 일들을 자초한 인간이 탐욕스럽고 사악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런데 1억5000만 년 전, 아무런 탐욕도 없고 사악하지도 않으며 감정도 없는 소행성이 지구에 충돌했을 때 그 많던 공룡은 모조리 멸종해버렸다. 사람이 전 세계에 있는 모든 핵무기를 모아서 일부러 최대한 많은 피해를 입히기 위해 일시에 터뜨린다고 해도 공룡을 멸종시킨 소행성에 비하면 장난스러운 불꽃놀이에 지나지 않는다.

지구 역사에서 공룡의 멸종과 같은 사건이 드물었던 것도 아니다. 과거에는 공룡의 멸종보다 더 혹독한 멸종도 있었다. 별 이유 없이 어느 날 갑자기 머나먼 섬의 땅속 화산이 어마어마하게 폭발하는 바람에 세상에 살던 동물 몇백만 마리가 모조리 멸종한다는 식의 사건이 잊을 만하면 터지던 곳이 지구다. 하다못해 둑이 없던 시절, 여름철마다 강물이 넘쳐서 주위를 휩쓰는 홍수만 해도 대단히 많은 동물을 비참한 죽음과 처지로 몰아넣었다.


인간이 멸종한 지구는 어떤 모습일까?

이런 장면을 한번 상상해보자. 어느 날 전 세계의 모든 사람이 ‘사람’이란 생태계를 파괴하는 사악한 생물이므로 모두 멸종시키기로 결심했다고 치자. 그렇다고 해서 거대한 폭탄을 도시마다 떨어뜨리는 거창한 광경을 상상할 필요는없다.세상 모든 사람이 그저 더 이상 출산을 하지 않기로만 결심하면 된다. 그렇게 잠시의 시간만 지나면 사람은 저절로 세상에서 사라져버린다. 사람은 원래 그 정도의 생물이다. 100세 시대라고 할지라도 사람이 더 이상 출산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100년만 기다리면 일부러 무슨 악마 같은 것이 난리를 치며 사람들을 잡아먹고 다니지 않아도 지구상에서 사람은 남김없이 모두 저절로 없어진다.

그러면 인공의 흔적이 점차 사라지는 세상이 올 것이다. ‘자연’이라는 말과 쉽게 연결되는 싱그러운 풍경은 지구상에 사람만 없으면 언제까지나 계속될까? 아스팔트 도로는 꽃 핀 초원으로 뒤덮이고 아파트 단지의 시멘트에서 사슴이 뛰어노는 세상이 그 후에 과연 펼쳐질까? 결코 그럴 리 없다. 심심할 때마다 반복되는 빙하기가 닥쳐오면 숲은 사라지고 산은 얼음으로 뒤덮이며 바다는 점차 말라붙는다. 우리 눈에 뜨일 만한 대부분의 동물은 추위와 굶주림을 버티지 못하고 목숨을 잃을 것이다. 생태계는 어느 때보다 가혹하게 격변하고 동물들은 멸종당할 것이다. 그런 잔인한 빙하기가 끼니 챙겨 먹듯 별일 아닌 것처럼 일어나는 것이 정상적인 지구다.

‘그러니 어차피 망할 것, 생태계 파괴 따위는 걱정하지 말고 환경보호는 무시하고 살자.’ 당연히 이 이야기가 이런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내가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의 핵심은 결국 사람의 환경보호란 어쩔 수 없이 사람의 관점에서 사람의 미래를 지키기 위한 활동이라는 사실에 더 주목해야 한다는 점이다.


지구가 아닌, 사람을 향한 환경보호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이런 관점이 너무 편협한 이기주의 발상이라고 비판할 지도 모르겠다. 사람만을 위해 생각하고 대비한다는 관점을 극복하는 것이 옳으며, 다른 생물과 생태계 조화의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을 수 있다. 나는 그런 생각도 가치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그런 발상조차도 대체로 우리가 바라보는 생물과 생태계가 사람이 지구에 머무는 시간 동안 친숙해진 것의 영향 아래에 있을 수밖에 없다. 숲이 사라지면서 살 곳을 잃고 죽어가는 곰 이야기에 눈물 흘리는 사람은 많다. 그런 곰을 구해주는 것은 자연보호 같다. 하지만 30억 년 전 산소가 없는 매캐한 공기 속에서 살던 거대한 세균들의 군집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여러 사람의 심금을 울리기란 어렵다. 그때 그 세균들을 다시 지구상에 나타나게 하는 것도 자연보호인가? 즉, 조화로운 자연을 존중해야 한다는 주장도 지금까지 사람에게 조화로운 느낌을 준 자연을 중시해야 한다는 설명에서 그다지 먼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을 극복하고, 사람다운 감상마저 넘어서서 정말로 객관적 기준으로 지구상 모든 생물을 존중하자는 철학을 내세우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들의 동의와 사회 정책으로 어떤 일을 수행하기 위해 통달의 경지에 가까운 그런 철학을 다들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너무 힘들어 보인다.

따라서 나는 환경보호를 위한 정책과 활동은 사람이 받는 영향과 위험을 더 적극적으로 따져보고, 그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방향으로 좀 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썩지 않는 쓰레기를 버리면 산에 널브러진 쓰레기들이 보기에 안 좋다는 점보다는 그런 쓰레기를 모아서 매립할 곳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 쓰레기 악취 때문에 얼마나 고생할 것인지에 먼저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수질을 더 많이 오염시키는 세제가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내가 자주 가는 낚시터에 죽은 물고기가 떠오르는 장면이 너무 충격적이라는 문제보다는 그 강에서 수돗물을 끌어오는 주민이 물을 정화하기 위해 세금을 얼마나 더 많이 내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런 노력은 결코 간단하고 쉬운 것이 아니다. 환경을 보호한다는 말을 들으면 누구나 쉽게 푸른 숲이나 맑은 계곡물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런 풍경에 대충 어울리는 느낌의 일을 한다는 것만으로는 환경보호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환경보호를 위해 여러 가지 선택 중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실제로 환경 속에서 사는 사람의 미래에 더 도움이 되는지 따져보고, 계산해보고, 측정해봐야 한다. 그저 막연히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내가 지니고 있다고 믿는 것만으로는 어느 길이 옳은지 알 수 없다. 우리 집 뒷산에 풍력발전소를 짓는 것이 사람의 미래에 도움이 되는 환경보호인지, 그곳에 태양광발전소를 짓는 것이 더 좋은지 알기 위해서는 그것을 판단하고 이해하기 위한 노력과 고민이 필요하다.

환경보호 문제까지도 이렇게 사람 중심으로만 생각해야 하나? 당장 사람 중심으로만 생각해 아무런 문제가 없을 줄 알고 저지른 일이 나중에 생태계의 오묘하고 복잡한 변화에 의해 결국 큰 피해로 돌아오면 어쩔 건데? 이런 반문은 제기해볼 만하다. 그러나 나는 그렇다면 그 알기 어려운 영향조차 알아내기 위해 최대한 더 노력하는 것을 과제로 삼아야 한다고 대답하고 싶다.

환경보호 문제는 더 이상 고상한 취향을 드러내기 위한 선행 같은 것이 아니다. 환경보호는 미래에 우리가 어떻게 버틸 수 있을 것이냐에 대한 더 긴박하고 현실적 문제다. 당연히 사람의 손길에서 벗어난 자연의 섭리가 주는 평온한 느낌 같은 흐리멍덩한 목표보다는 사람을 살리기 위한 치밀한 계산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환경보호를 위해서는 나부터 작은 실천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나는 과연 어떤 작은 실천을 하는 것이 맞는지 알아보기 위해 더 애쓰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 지구온난화로 기후변화 위기의 재앙이 벌어지면 머나먼 인도양의 휴양지 섬이 가라앉을 거라고 안타까워하기 전에, 더 급작스럽게 찾아오는 집중호우에 배수가 역류하는 도시에서 반지하방에 사는 사람들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지 먼저 따져보아야 한다는 뜻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곽재식


소설가이자 공학박사로, 현재 화학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특히 환경보호에 관한 업무를 지난 10여 년간 꾸준히 맡아왔다. 쓴 책으로는 《우리가 과학을 사랑하는 법》, 《한국 괴물 대백과》, 《항상 앞부분만 쓰다가 그만두는 당신을 위한 어떻게든 글쓰기》, 《곽재식의 세균 박람회》 등 과학 논픽션, SF 소설 등 다양한 장르에서 왕성한 글쓰기 활동을 펼치고 있다.

  • 2020.04.26
  • writer. 곽재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