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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yes — Issue 2. 휴가

아빠 둘 아이 셋의 이탈리아 여행기

2 fathers 3 kids in Italy

  • 2016.09.23
  • Illust 곽명주
  • Words 우승우

열 살짜리 딸아이와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왔다. 특별한 것이라면 나에게는 아내가, 아이에게는 엄마가 없었다. 우리 가족 모두에게 가장 완벽한 휴가로 남을 7박 8일간의 이탈리아 여행기.

아내에게 휴가를 주기 위해 떠난 여행
딸과 함께 한 여행 경험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경기도 어딘가로 캠핑을 갔고, 당일치기로 기차 여행도 다녀왔다. 하지만 아이를 둔 가정이 대개 그러하듯 언제나 가족 여행이었다. 한 번도 딸과 단둘이 떠나는 여행을 생각해본 적은 없다. 그렇다고 딱히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아이에게 늘 일순위인 엄마를 떼어내고 단둘이 여행하면 어떨까 하는 호기심이 일었다. 재미있을 것 같았다. 내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딸아이에 대한 미안함을 털어내고 싶었다. 불혹의 평범한 가장, 즉 ‘바쁜 아빠’로 살아온 나에게 이제 곧 사춘기가 시작될 우리 딸과 둘만의 추억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필요했다. 이 모든 결정의 가장 큰 수혜자는 역시 아내였다. 평소 일과 육아를 모두 감당하느라 고생한 아내에게 완전한 자유의 시간을 주고 싶었다. 아내가 혼자만의 휴가를 즐길 수 있을 정도의 기간을 확보하려면 조금 길고, 조금 먼 곳으로 일정을 계획해야 했다. 여행의 목적지는 이탈리아 남부. 와인을 좋아하는 나에게도, 피자와 파스타를 좋아하는 아이에게도 완벽한 만족감을 주는 최적의 지역이라 믿었다.


아빠 둘 아이 셋 프로젝트
어쨌거나 아내가 함께 하지 않는 여행은 낯설었다. 동료 아니 동지가 필요했다. 이 여행에 동참한 또 다른 아빠는 개인 사업을 하는 20년 지기 친구다. 약속을 몇 번이나 미루다 6월 어느 날, 우리는 이번 여행을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기 위해 머리를 맞댔다. 남자들끼리 가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았지만 나는 이미 아내에게 휴가를 주기로 하지 않았던가! 숙소는 현지의 삶을 경험할 수 있게 에어비앤비로, 이동은 렌터카를 이용하기로 했다. 여행을 준비하는 데 각자의 역할도 공평하게 나눴다. 내 딸과 친구의 다섯 살짜리 아들, 그리고 친구의 조카인 여자아이도 깍두기로 합류했다.


우리는 이 용감한 여행을 ‘아빠 둘 아이 셋 프로젝트’로 부르기로 했다. 경로는 로마를 시작으로 피렌체, 피사, 아시시, 나폴리를 여행하는 것으로 짰다. 고대 로마의 대표적 유적지인 콜로세움을 방문하고, 토스카나의 와이너리에서 우아하게 와인을 마실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잔뜩 기대에 부풀었다.


다른 일정 때문에 로마로 곧바로 합류하기로 한 친구를 대신해 세 아이를 공항에서 처음 대면한 나는 그때서야 현실을 직시했다. 면세점을 뒤져 찾아낸 또봇 두 개와 스튜어디스 언니들의 헌신, 그것이 필요했는지 안 했는지 모를 나의 끊임없는 관심 덕에 12시간 동안의 비행을 긴장 속에서 무사히 마치고 로마에 도착했건만 아이들과 함께 하는 여행은 예측 불허의 연속이었다. 이탈리아의 명소들은 아이들에게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다.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기 위해 계획한 콜로세움이나 피사의 사탑과 같은 역사적 유적지는 아이들에게 이름 모를 분수대의 물놀이와 노천의 젤라토 가게보다 못한 존재였다.
유일하게 나를 위해 계획한 와이너리 방문 역시 어이없게 무산되었다. 토스카나 지역의 대표적 와이너리에서 가까운 곳에 숙소를 잡았건만 뒷마당 고양이와 노는 데 정신이 팔린 아이들 때문에 그곳은 말 그대로 그림의 떡이었다. 토스카나에 와서, 그것도 7박 8일 동안, 와이너리를 들르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다섯 살 꼬마의 에너지는 어찌나 대단한지 아들을 키워보지 않은 나에게 완전히 새로운 세계였고, 아이들은 종일 무더위에 지쳐 에어컨을 외쳐댔다. 아이 셋을 붙여놓으니 3남매를 키우는 이전 회사 동료가 존경스러웠다. 그래도 우리는 매일 밤 와인을 마셨다. 우아하진 못했지만 이탈리아에 오니 마트에서 산 와인도 참 달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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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라서 가능했던 여행의 순간들
15년 만에 다시 찾은 로마는 그 당시보다 많이 작아진 느낌이었다. 그 규모나 장대함도 이전만큼 큰 감동을 주지 못했다. 어떤 곳을 바라봐도 뷰 파인더 속 작품이 되는 로마였지만, 우리 다섯 멤버는 그 누구도 관광에 집중하지 않았다. 어디를 봐야 한다는 목적의식보다는 아이들의 느린 걸음으로 도시를 구석구석 살피고, 걷고, 이야기 나누고, 또 쉬었다가 다시 걸었다.


무심하고 투박한 아빠와 떠난 여행은 아이들에게도 좀 달랐을 것이다. 아빠는 낯선 환경에서도 좀처럼 조심스럽거나 신중하지 않았고, 주변을 의식하지도 않았다. 아이들 입맛을 세심하게 고려한 엄마의 밥상에 비해 매일 아침 식사 역시 고민한 결과물은 아니었다. 샌드위치, 달걀, 과일, 주스 등 엄마가 차린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역시 반응은 좋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는 길거리 음식을 사 먹는 것에 관대했고, 이에 아이들은 환호했다. 저녁 늦게 도착한 이탈리아 남부 아말피 해변에서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밥도 먹지 않고 옷을 흠뻑 적시며 마음껏 수영하는 아이들 모습을 지켜보니 엄마의 잔소리가 저 뒤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우리 여행은 좀 더 자유로웠다.


여행지에서 바라본 딸의 모습은 새로웠다. 평소 출근 전과 퇴근 후에 잠깐씩 얼굴을 보던 우리의 단편적 만남이 하루 종일 일주일간 지속되면서 나는 아이의 성장을 객관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사소한 행동이나 언어 습관, 혹은 어린 동생을 챙기거나 낯선 사람을 대하는 모습을 통해 아이의 고유한 개성을 이해하게 되었다. 내 딸이면서도 아이의 습관과 취향에 이렇게까지 무심했나 하는 반성을 하기도 했다.


여행을 함께 계획하고, 경험하고, 대화를 나누는 시간은 우리 부녀를 친구로 만들어주었다. 그중 가장 큰 소득은 서로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기회를 가졌다는 것. 내가 아이를 잘 몰랐듯, 아이 역시 아빠를 잘 모른다. 아빠가 어떤 사람인지 있는 그대로 딸에게 드러내 보이는 것이 어쩌면 용기라는 생각도 든다. 부모로서 앞으로 어떻게 아이와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엄마 없는 여행에서 필요한 몇 가지
여행은 언제나 옳다. 하지만 아내가 함께 하지 않는 여행은 쉽지 않다. 당신이 아이와 함께 여행을 떠난다면 아마도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많이 보이지 않는 세심한 배려와 보살핌 속에 살았는지 느끼게 될 것이다. 여행의 순간에 감동하다가도 “사서 고생”이라는 말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그런데 다행인 것은 먹고, 입고, 씻고, 자고, 짐 싸고를 반복해야 하는 여행에서 열 살짜리 여자아이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혼자 할 수 있다는 것이다. 7시간의 시차도 극복했고, 낯선 도시에서 심지어 요트 위에서 잠자는 것도 편안해했다. 아이의 여행은 어른의 그것과 많이 다르지 않았다. 아이들 역시 새로운 도시에서 색다른 경험을 즐겼고, 우리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이탈리아 사람들의 눈길에 자연스럽게 대응하는 법도 터득하게 되었다. 아이가 돌봐야 할 대상이 아니라 훌륭한 여행 파트너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이와 함께 여행을 떠날 계획이 있는 아빠에게 몇 가지 당부하자면 아이가 좋아하는 피자와 파스타는 ‘가끔’이라는 전제가 있으니 반드시 햇반을 챙기라는 것, 에어비앤비로 예약하려면 에어컨은 설치되어 있는지 꼭 확인할 것, 아이의 간식(기내에서 먹을 블루베리나 옥수수 같은)이나 모기약을 챙겨주는 아내의 혜안을 불평 없이 따르라는 것이다.


딸과 함께 여행에서 돌아온 나에게 아내는 그 어느 때보다 존경스러운 눈빛을 보냈고, 아이는 아빠와 함께 한 여행에 대한 아주 긴 감상을 일기장에 남겼다. 이 특별하고 완벽한 여행을 또 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벌써부터 우리는 우리만의 내년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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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우

열 살 딸아이의 아빠이며, 현재 크리에이티브 콘텐츠 그룹인 ‘72초 TV’ 부사장이자 브랜드 컨설턴트다. 외식, 주류, 매거진, B2B 분야에서 마케터와 브랜드 매니저로, ‘더플레이컴퍼니’의 공동 창업자로, ‘인터브랜드’에서는 컨설턴트로 활동한 바 있다. 여행과 맥주, 서점과 책, 공간과 콘텐츠, 아날로그와 디지털, 읽기와 쓰기 등 잡다한 분야에 관심이 많다.

  • 2016.09.23
  • Illust 곽명주
  • Words 우승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