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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yes — Issue 18. 오늘의 패션

속옷을 고르며

Choosing Underwear

  • 2020.12.27
  • Writer. 오종길

패션 fashion은 활동하는 것(doing), 혹은 만드는 것(making)을 뜻하는 라틴어 팩티오 factio에서 유래했다. 즉, 패션이라는 단어는 ‘옷’을 넘어 다양한 분야를 아우른다. 지금부터 우리네 일상 곳곳의 모든 양식, 그 너머의 패션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려 한다.

나는 매일 아침 속옷 고르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 오늘의 날씨·기분·일정에 따라 적절한 것을 고르는데, 속옷 고르는 행위는 일상의 면면에 감수성을 부여하는 태도다. 별생각 없이 손에 집히는 대로 입어도 될 속옷에 섬세하게 다가가보는 시도다. 누군가에게 보이는 것도 아니고, 겉옷 안에 입는 그야말로 속의 옷에 불과한 그것을 구태여 매일 아침 정성껏 골라 입는 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는가? 속옷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의류라 말한다면 이해할 수 있겠는가? 속살에 닿은 내밀한 속사정 같은 것을 그려본다면 응당 그렇다 할 수밖에 없다.

2018년 겨울이었다. 현경은 의류에 관한 작고 가벼운 시리즈를 기획하고 있는데, 내게 함께 하지 않겠냐고 물어왔다. 그는 웜그레이앤블루 출판사를 운영하는 독립 출판 제작자로, 우리는 이따금 책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였다. 나는 그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고, 외투나 셋업 set-up에 관한 글을 모으면 좋겠다는 구상도 해두었다. 하지만 막상 모든 일은 계획대로 되지 않고 대부분의 글 역시 첫 문장과는 다르게 흘러가듯, 나는 속옷에 관한 이야기를 줄줄이 쓰고 있었다. 그렇게 탄생한 책이 《속옷을 고르며》이다.

《속옷을 고르며》를 쓴 저자답게 나는 더 고심해서 그날의 속옷을 고른다. 멋스러운 속옷을 고집하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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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옷을 고르는 시간은 지난 하루를 돌아보고 나에게 주어진 하루를 정비하는 과정을 거쳐 하루 치 마음가짐을 다잡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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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속옷 수납장에는 ‘사랑’, ‘희망’, ‘용기’라는 이름을 붙여준 속옷도 있고, 마감을 앞두고 즐겨 입는 속옷, 분주하게 돌아다녀야 하는 날 손이 자주 가는 속옷도 있다. 요즘엔 자주 입지 않지만, 어느 겨울에 ‘죄악’이라 이름 지어준 속옷도 있다. 속옷에는 저마다의 기분과 적절한 날의 나를 만나 피어날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다고 믿는다.

무화과 향수를 뿌리는 날

이제는 코워커 coworker가 된 현경이 얼마 전 내게 무화과 향수를 선물로 주었다. 몇 주 전 상일동역에 사는 욱 형네 집에 갔을 땐 색색의 양말을 선물받았고, 책방 동료 보람 누나는 은은한 빛깔의 팔찌를 주었으며, 영혼의 파트너 어진은 생애 첫 목걸이를, 희진 누나는 수제 비누를 무심하게 건넸다. 친구들은 늘 내게 무언가를 준다. 나는 그들의 마음을 받을 때면 약간의 책임감과 부채감, 기쁨과 슬픔 따위를 동시에 느낀다.여행을 다녀온 친구들은 빈손으로 돌아오는 법이 없어 나는 서울에만 머물고 있음에도 아메리카 대륙과 동남아시아, 제주도와 강원도에 다녀온 기분을 만끽한다. 그곳의 냄새와 추억이 스민 선물과 마음이, 그들의 사랑이 내 방 곳곳에서 만개한다. 내가 그들과 같은 향수에 젖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친구들이 건네는 마음을 받을 때마다 오늘의 팬티를 떠올린다. 아름답고 소중한 마음 한 조각을 감히 받아도 되는지 의문이 들어 속옷의 감각을 떠올려본다. 아침에 골라 입은 속옷처럼 눈에는 보이지 않고, 무화과 향수처럼 잔향으로만 느껴지는 것이 사랑을 주고받는 것일까? 친구들의 마음을 덜컥 받은 날의 팬티가 사랑이었음에 마음이 조금 놓인다. 내가 받은 사랑과 입고 있는 사랑, 줄 수 있는 사랑 모두 실은 다르지 않으니까. 우리가 서로의 사랑을 잊지 않으려 자주 꺼내어 확인하고 건네면 오늘 하루가 사랑과 가까워지는 건지도 모를 일이니까. 그들이 내게 준 조각들은 내 삶을 굴러가게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동시에 그들의 생을 풍요롭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는 생각에 닿는다. 내가 누군가에게 쑥스럽게 건넨 애정들이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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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르게 화려한 속옷을 입곤 무채색 상·하의를 걸치는 날과 ‘용기’라는 이름이 붙은 팬티를 챙겨 입고 나서는 날의 기분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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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친 나머지 낡은 속옷에 다리를 구겨 넣는 무기력함, 잘못 고른 속옷으로 후회한 날도 얼마든지 있다. 오랜 추억이 스며든 속옷은 서랍 깊숙한 곳에서 먼지가 쌓여가고 있겠지. 귀여운 속옷을 골라 입은 아침에는 보고픈 친구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리고 나의 친구들이 1층에서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장면을 상상해본다. 그 귀여운 얼굴들이 지각한 나를 타박하는 것조차도 소중하게 느껴진다.

무화과 향수를 뿌리는 날과 개나리색 양말을 꺼내 신는 산뜻함, 하얀색 속옷을 고르는 아침을 모두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다. 비건 지향 친구와 함께 먹는 점심도, 선물로 받은 커피나 진심 어린 쪽지, 용건 없이도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는 잠깐의 여유 모두 좋다. 무엇 하나 마음이 담기지 않은 찰나는 없고, 내겐 그 모두가 사랑으로 향하는 작은 걸음걸음이다.

나의 친구들이 사는 우리 동네

마음이 찰랑이면 동네를 천천히 걷는다. 내가 사는 동네의 소소하고 일상적 풍경을 구경하며 산책하는 사이 마음이 평온해지기 때문이다. 벤치에 앉아 익숙한 얼굴의 어르신들이 늘 같은 시각에 모여 하는 활동을 본다. 놀이터엔 아슬아슬하게 발을 놀리며 걷는 아이가 있다. 한가로운 휴일에 볕과 바람을 느끼러 마실 나온 청년은 평일에 휴무를 맞이했을 것이다. 그 얼굴엔 휴식의 달콤함과 일상의 고단함이 서려 있다. 내 마음의 찰랑임이 무엇에서 비롯했건 잠시나마 잊은 채 평화로운 시간을 보낸다.

‘쪽매 맞춤’이란 말은 참 아름답고, 퀼트가 불가능한 자투리는 없다. 지금의 나는 강한 믿음을 갖고 있다. 연대를 향한 믿음이다. 우리 동네 사람들, 함께 일하는 동료들, 마음을 동하게 하는 친구들은 물론, 다양한 크기와 농도로 얽힌 지역사회 모두에게 말이다. 보이거나 말하지 않는 것일지라도, 미미하고 미약한 수준에 불과할지라도 그렇다. 작은 조각, 조금은 다른 헝겊 자투리 모두를 기워 만든 조각보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우리는 알고 있다. 이제는 그런 것들의 힘을 믿고 또 믿는다.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관계들을 구태여 헤아릴 필요가 있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조각조각을 세세하게 느끼는 일은 속옷 고르는 시간을 마련하는 마음가짐이나 지난날을 추억하고, 주어진 하루를 준비하는 자세, 이러한 작은 것의 힘을 믿고 살아가는 날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나와 나를 둘러싼 이들의 손을 잡아 품을 내주며 어깨가 흥건해질 때까지 눈물 쏟을 수 있도록 그들 곁을 지키겠다는, 무릎 베고 잠드는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발이 저려와도 기다려줄 거라는 강한 의지다. 속옷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또 잊지 않도록 부지런히 꺼내 보는 것은 우리의 이야기가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알려주고 싶기 때문이다. 처음 속옷에 관한 이야기를 엮을 땐 팬티 한 장을 골라 입고 집을 나서는 나 자신을 여러 번 돌아봤다. 히어로물 속 영웅들이 자신만의 복장이나 무기를 챙겨 나서듯이 내겐 속옷이 그런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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짊어진 책임을 다하기 위해, 오늘 하루를 살아내기 위해 단단히 챙겨 입고 나서는 비장함 같은 것이었다. 부디 무너지지 않도록 나를 다잡는 태도, 속옷엔 그런 의미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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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여전히 속옷의 힘을 믿는다. 달라진 점이라면 이제는 좀 더 나아가 우리 모두 저마다의 삶에서 각자의 속옷을 감각하기를 염원하고, 또 그런 우리가 모여 이룬 나의 동네, 당신의 마을, 우리의 세상이 무한한 가능성을 틔우길 소망하는 것이다.

오늘 고른 속옷은 수미상관

오늘 아침엔 요즘 즐겨 입는 캘빈 클라인 회색 드로어즈 drawers를 골랐다. 흐리지만 따뜻한 회색의 이 속옷은 다른 색이 조금도 섞이지 않아 차분한 느낌이 들고, 보드라운 촉감을 자랑한다. 기쁨과 슬픔이 공존하는 회색 드로어즈를 골라 입는 요즘의 나는 우리가 함께 나아갈 삶을 궁리한다. 하루하루가 내게 어떤 의미이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 또 그들이 모여 이룬 나날이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을지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저 아침이면 지나간 하루를 곰곰이 생각하며 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곱씹고, 감추고픈 장면을 반성한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기대해보면서 하루를 맞이한다. 감각을 감각하는 예민한 감수성은 귀찮은 성정일 수도 있지만, 보이지 않는 것의 힘은 분명 상상 그 이상이다. 무궁무진한 잠재력이 숨어 있는 속 이야기들이 궁금하지 않은가? 무심코 넘길 일에 가까이 다가가 그 내밀한 속을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가? 오늘의 속옷을 고르듯 내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하루가 되길 바란다. 친구들의 속 또한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우리가 함께 이룰 아름다운 동네를 거닌다면 참으로 좋을 테니.

한 장 속옷이 나를 만나 시작하는 하루에서 다채로운 속옷 이야기가 풍성하게, 그리고 찬란하게 피어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오늘의 속옷으로 희망을 골라 힘차게 하루를 시작해봄은 어떨까? 오늘, 나의 속옷은 바로 당신이다.

오종길

속옷을 고르는 마음은 사랑에 닿아 있다고 믿는다. 낡고 해진 컨버스를 아무렇지 않게 매일 신어도 팬티는 매일 아침 고심해서 고른다.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연필로 글을 쓴다. 연필심을 이루는 탄소는 보이지 않아도 무엇이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책 《속옷을 고르며》, 《같은 향수를 쓰는 사람》(공저), 《무화과와 리슬링》, 《저크 오프》 등을 냈다.

  • 2020.12.27
  • Writer. 오종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