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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eas — Issue 18. 오늘의 패션

빈티지, 귀를 기울이면

LEND AN EAR TO VINTAGE

  • 2020.11.23
  • Editor. 조서형
  • Photographer. 이주연

시대를 거슬러 오래 사랑받아온 빈티지에는 역사와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리고 여전히 아주 멋스럽다. ‘수박 빈티지’에서 옷과 물건을 몇 가지 골랐다. 더 듣고 싶어지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자꾸자꾸 딸려 나왔다.

1940년대 미국 해병대 군복
“밑단을 접으면 이렇게 다른 색이 나와요. 정글에서 싸울 때는 초록색이, 사막에서 싸울 때는 베이지색이 앞으로 나오도록 뒤집어 입는 리버서블 아이템이에요. 워낙 구하기 어려운 아이템이라 원형 그대로 두고 싶었는데, 판매하기 위해 허리 수선을 했어요.”

폴로 랄프 로렌 패턴 넥타이
“꿩이나 날치, 참치 같은 게 프린트된 넥타이를 그냥 지나치지 못해요. 고급스러운 프레피 룩을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넥타이로 포인트 주는 건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위트 있는 넥타이를 매는 건 즐겁죠. 옥스퍼드 면 셔츠도 좋지만, 저라면 샴브레이 셔츠와 매치하고 싶네요.”

폴로 랄프 로렌 플라워 패턴 셔츠
“평생 폴로 셔츠만 입고 살라고 해도 얼마든지 즐겁게 입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여름이면 나일론 반바지에 넉넉한 사이즈의 셔츠 하나 걸쳐도 좋아요. 스웨이드 로퍼나 보트 슈즈를 신으면 근사함까지 갖출 수 있을 거예요. 은은하고 우아한 플라워 패턴 좋지 않나요? 이건 여성용 셔츠지만.”

1950년대 오리지널 스카잔
“큰 틀 안에서 그날그날 올리고 싶은 걸 사진 찍어요. 인스타그램 피드와 스토리, 블로그, 유튜브에서 수박의 빈티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지요. 스카잔의 특징은 광택이 있는 소재와 화려한 자수예요. 이 제품은 양면을 다 활용해 입을 수 있어요. 《성경》을 올려두고 읽기 위한 ‘처치 체어 Church Chair’는 위탁 판매하고 있어요.”

에르메스 솔라로 싱글 코트
“에르메스 싱글 코트의 겉모습은 모던하고 속은 클래식해요. 차르르 떨어지는 뒤태가 매력적이라 슈트랑 같이 입어도 멋있죠. 하지만 저는 슈트 대신 볼캡에 데님을 매치했어요. 럭셔리를 럭셔리로 풀면 별로 재미없으니까요.”

1970년대 까르띠에 탱크
“까르띠에의 시계 ‘탱크’를 숱하게 팔았지만, 아직 착용할 형편은 못 돼요. 만약 살 수 있다면 주저 않고 이 모델을 고를 거예요. 가장 잔꾀 부리지 않는 디자인의 1970년대 탱크.”

수다스러운 빈티지


김정열 / 수박 빈티지 대표 / 39세

수박 빈티지 운영진이 궁금해요. 어떤 사람이 모여 만들고 있나요?
패션을 좋아하는 제가 있고요, ‘옷발’이 기가 막히는 친구 수‘박지원’, 그리고 조건희가 있어요. 유명 브랜드 VMD로 있던 저희 손님이었는데, 꼬여서 데려왔어요.
처음에 가게를 열었을 땐 손님이 없어서 졸기도 하고 그랬어요. 아무도 들르지 않는 날도 많았거든요. 심심한데 옷 좀 입어볼까 하다가 사진도 찍고, 사진이 잘 나오면 업로드하던 게 지금 수박 빈티지 인스타그램의 시작이에요. 그러다 김창옥 교수님이 하루에 5개씩 인스타그램 업로드를 해보라고 조언을 해줬어요. 창옥이 형은 수박 빈티지의 이사고, ‘아무것도 안 하기’를 맡고 있어요.

지금은 숍을 운영하는 데 가장 신경 쓰는 게 글쓰기라고요.
네, 하나의 웹진을 운영한다 생각해요. 업로드 5개를 아예 숙제로 정했어요. 직접 입고 찍은 ‘착용 샷’, 바닥에 제품을 깔아두고 스타일링한 ‘바닥 샷’, 제품만 단독으로 찍은 ‘아이템 샷’, 1990년대 영화나 패션쇼 런웨이 같은 근사한 이미지, 패션계 뉴스, 매장 운영과 관련한 에피소드 등으로 카테고리를 나누었어요. 마지막 카테고리엔 주로 지나가는 고양이 얘기 같은 게 나와요. 맨날 같은 걸 올리면 피드도 심심하고 올리는 사람도 재미가 없잖아요. 혼자 다 올리진 않고 직원들과 돌아가면서 해요.
어릴 때부터 잡지랑 신문 보는 걸 좋아했어요. 군대에서는 스크랩까지 해가며 잡지를 봤고요. 보면 ‘꼭지’라는 게 있잖아요. 문화, 패션, 라이프스타일 섹션 같은. 그렇게 다양하게 구성해보려고 노력했어요. 인스타그램은 쿨한 미디어라 긴 글을 선호하지 않아요. 하지만 여전히 수박 빈티지는 이렇게 스토리텔링하고, 정보를 공유받길 원하는 손님을 팬으로 만들어요.

스토리텔링은 수박 빈티지의 큰 장점이에요.
수박의 스타일링과 스토리텔링은 유니크한 셀링 포인트죠. 좋은 물건을 그냥 보여주는 데서 끝나지 않으려 해요. 물건이 품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옷을 살짝 다르면서도 근사하게 입을 수 있는 해답을 제시하려 노력하죠. 패션에는 정답이 없으니까요. 빈티지는 스토리텔링이 없으면 팔기도 어렵고 파는 재미도 없어요.

업로드에 필요한 정보를 위해 옛날 책도 찾아 읽는 것 같아요.
시대에 맞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미지가 아닌 글이 제 무기라 어쩔 수가 없어요. 글감을 찾아 책을 들춰보는 거죠. 면을 구성하는 레이아웃을 주로 봐요. 사용하는 단어들도 보고요. 깊이 있게 읽고 재해석하는 수준까지는 아니고 가볍게 보면서 영감이 될 만한 것을 찾아 유통하는 거죠. 수박의 메인 바이브인 1990년대 잡지들은 보기만 해도 그냥 좋아요.

또 참고하는 게 있다면요?
인플루언서나 패션 피플은 잘 몰라요. 대신 의류 유통업계 사장님의 블로그를 열심히 봐요. 특히 빛과장과 소금상무, 보노비스타에 올라오는 글은 놓치지 않고 챙겨 읽어요. 수박을 시작하기 전에는 스콧 슈만의 사토리얼 리스트, ‘한국 신사’ 이헌, 전정욱의 ‘andy’s room’의 블로그를 보며 패션의 신세계를 열었죠.

메인 타깃이 30~40대라고요.
30대 전후 옷을 취미로 사는 사람이 수박의 주 고객이에요. 경험상 주인 나이에서 위아래로 열 살 정도가 타깃인 게 좋더라고요. 3040이면 이미 스타일이 몇 바퀴 돌아 옷장도 여러 번 갈아엎은 다음 일 테고, 그러면서 어느 정도 자기 스타일이 형성되는 시기예요. TPO에 신경 써야 해서 자기 스타일만 고집하는 쇼핑도 끝났을 때고요. 옷을 많이 사 입어본 사람 눈에만 보이는 것들이 있어요. 요즘 옷들의 원형인 빈티지에서는 ‘어, 이거 좀 다른데? 맛이 더 좋은데?’ 하는 걸 느낄 수 있죠.
자연스럽게 시간을 먹어가며 낡은 옷의 매력은 막강할 수밖에 없어요. 100년 전만 해도 옷은 보호막 역할이 컸어요. 지금처럼 사무실이 있거나 교통수단을 활용하지 않았잖아요. 밖에서 일하고 걸어 다니는 사람을 위해 튼튼한 옷을 만들었지요. 그 두껍고 무거운 옷이 수십 년 동안 낡고 닳으면서 조금씩 부드러워져요. 그 느낌을 좋아해요. 해지거나 오염된 부분이 마치 나이테처럼 따라 할 수 없는 깊이가 있죠. 세컨드핸드나 빈티지는 대부분 캐주얼이고, 그건 20 대가 접근하기 좋은 옷이에요. 그들에게 어필하는 숍은 이미 많아요. 보수적 조직인 교회에서 목사로 생활한 저는 재킷과 타이로 승부해야겠다고 생각했죠. 매일 재킷을 입고 회사 생활을 하던 사람이 빈티지 숍을 운영하는 경우는 많지 않으니까 틈새 공략을 해보자 싶었어요.

수박 빈티지의 목표는 무엇인가요?
대단한 비전은 없어요. 헌 옷을 파는 건 단지 거룩한 밥벌이예요. 멋진 헌 옷을 열심히 찾고 정직하게 팔아요. 그걸 반복하는 게 수박의 비전이에요. 구제 옷을 좋아한 계기는 부족한 용돈 탓이었지만, 그냥 싼 물건을 팔고 싶진 않았어요. 안목 있는 큐레이션과 스타일링으로 유명해지고 싶어요.
빈티지가 희귀하고 유일해서 좋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예뻐서 좋은 거죠. 예쁘면 장땡이에요. 독특한 빈티지 피스를 많이 가지고 있기보다 손님이 원하는 제품을 적당한 가격에 팔고 싶어요. 가게 운영을 잘 해나가고, 집에 생활비도 가져다줄 수 있게 말이에요. ‘나는 비즈니스맨이지 컬렉터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해요.

  • 2020.11.23
  • Editor. 조서형
  • Photographer. 이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