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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 좋은 그릇과 살림 도구마저 없었다면

What Would I Do Without Those Pleasant Tablewares and Tools?

  • 2020.08.27
  • Editor. 김하민
  • Writer. 정성갑
  • Photographer. 정성갑

직장을 그만두고 자연스레 집안 살림을 도맡게 됐다. 하루에 세 번 미션이 주어지는데, 그건 바로 아이들 밥상 차리기. 이젠 ‘아빠 밥’ 소리만 들어도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모던 파더 정성갑의 집안 살림 고군분투기, 그리고 그 고단함을 구원한 아름다운 살림살이 이야기.

‘밥’ 소리만 들어도 한숨이 나오더라

“뭐야, 회사에서 늦게까지 일하면서 밥은 왜 안 먹고 와”

아내의 이 말 한마디가 그렇게나 서운했다. 화장실 가는 것도 참고, 밥 먹는 시간도 아껴 한 30분이라도 일찍 퇴근하려는 사람에게 쏘아붙이는 말이라니. 있는 반찬에 밥 좀 차려주는 게 뭐 그리 힘들다고. 그러고 보면 남자는 평생 ‘밥’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가끔 밥과 밥상에 아무런 미련도, 집착도 없는 남자들을 보면 대단해 보이기까지 한다. 진정한 자유인 같고 완벽하게 ‘자립’에 성공한 사람 같다.

그런데 이 말을 요즘은 내가 한다. 1년 만에 상황이 급변했다. 여차여차해서 나는 직장을 그만두게 됐고, 아내의 사업은 점점 잘 돼 평일에도 밤 11시 넘어까지 야근을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렇다고 내가 농담 삼아 말하곤 했던 ‘셔터맨’의 꿈이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월급만큼의 수입을 가져오느라 여전히 아등바등 바쁘다.

당연히 밥상 차리기는 나의 일이 되었다. 애들 밥은 먹여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문제는 이 밥을 거의 삼시 세끼 차려야 한다는 것이다. 한창 먹성 좋은 초등학교 6학년과 2학년 두 딸은 “아빠 밥” 을 입에 달고 산다. 아침 밥상을 치우고 책상에 앉아 일을 하고 있으면 1시간도 안 돼 “아빠 배고파” 한다. 그렇게 점심을 해치우고 태권도 학원에 데려다 주고 집에 들어와 잠시 다리를 펴고 있으면 금방 곧 하원 시간. 요란하게 대문을 열고 집에 온 아이들은 또 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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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배고파. 뭐 먹을 거 없어?” 일의 리듬이 뚝뚝 끊기는 것은 물론이고 ‘밥’ 소리만 나와도 한숨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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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어떻게 된 건지 밥밖에 모른다. 빵도 안 먹고 외식도 싫어한다. “아그들아, 너네는 왜 빵을 안 먹어. 아침에는 빵도 좀 먹어야 아빠가 살지” 하고 푸념하듯 말했더니 “아빠, 우리는 한국인이거든. 한국인이 밥을 먹어야지 왜 빵을 먹어” 하고 말하는 게 아닌가. 어찌나 이마빡을 쥐어박고 싶던지. 이렇게 하루하루 밥과 씨름을 하는 상황에서 아내가 밥을 안 먹고 온다고 하면 괜히 열불이 난다. 기껏 설거지도 하고 반찬 정리도 다 했는데, 그걸 다시 꺼내 또 밥상을 차려야 한다고 생각하면 불쑥 짜증이 난다. 이건 아내를 사랑하는 것과 별개의 문제다.

아름다움이 고단함을 잊게 할 수 있을까

고단한 가사노동을 그나마 버티게 하는 것은 아름다운 그릇과 살림살이들이다. 잡지 기자로 오랫동안 일을 한 덕에 도예가며 금속공예가를 만날 일이 많았다. 그들 작업실에서 인터뷰를 하다 보면 그곳에 있는 작품들이 평범한 물건으로 보이지 않는다. 공예라는 건 손으로 두드리고, 접고, 매만진 모든 과정이 지문이자 온기로 담기는데 제작 과정인데, 소재와 추구하는 미감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 그 작품들에 절로 마음이 가 “저, 이건 얼마일까요?” 하고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한 점 두 점 집에 데리고 오는 아이들이 많아지면서 생활 속에 좋은 친구는 점점 늘어났다.

소확행의 기본은 잠시나마 집중하는 기분에 있다. 번잡하고 잡다한 고민일랑 떨쳐 버리고 마음 편히 집중해서 먹고 마시고 읽고 자고 쉬고 즐기는 데서 오는 쾌감. 옆에 두고 사용해 보니 공예품이야말로 소확행을 돕는 확실한 지렛대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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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만든 만듦새와 아름다운 미감의 물건을 고르고, 쥐고, 그 안에 음식을 담고, 물건에 담긴 손맛과 노동의 기운을 느끼고 있으면 잠시나마 기분이 좋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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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기분을 지렛대 삼아 내 앞에 있는 시간을 더 온전히 집중해서 즐기게 된다. ‘좋은 것’이 하나씩 올라가 있는 식탁은 고단한 일상에서 우리가 반복해서 누릴 수 있는 작지만 소중한 즐거움이 아닐까 싶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 도스도예프스키의 말이다. 세상을 구원하는지까지는 모르겠고 아름다운 물건이 지루하고 건조한 일상에 때때로 보드라운 숨결을 불어넣어 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니까 남자들이여, 아내가 그릇을 산다고, 주방 살림살이를 바꾼다고 핀잔을 주거나 한숨짓지 말지어다. 그렇게 그녀는 나름대로 집의 시간을 견디고 있는 것이다.  

식탁 위 격식을 높이는 공예품

천성적으로 식탁 위의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건 아니다. 언젠가 광주요 사모님을 뵌 적이 있다. 집에 초대받아 간 적이 있는데 자녀들이 어렸을 때부터 밥상 데코레이션에 신경을 쓰셨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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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 꼭 접시에 올리고, 그릇도 이왕이면 컬러 맞춤을 하고, 수저받침도 꼭 놓고. 그런 식습관이 쌓여 은연중에 자신을 귀하게 대한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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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이 머릿속 깊이 각인돼 이후 애들 밥상을 차릴 일이 있으면 꼭 ‘오바’를 한다. 그냥 밥그릇만 놔도 되는데 허명욱 작가의 1인용 사각 옻칠 트레이를 꺼내 그 위에 밥그릇을 올리고 류연희 작가의 얇은 황동 수저받침을 옆에 놓는다. 요즘은 김치를 꼭 이정미 작가의 블루 사발에 담는다. 지중해에서나 봄직한 아주 진하고 묵직한 코발트 컬러. 소성 단계에서 불의 온도를 돌연 확 낮추면 그릇 표면에 눈꽃 무늬가 가득 생기는데 그릇에 핀 꽃이라니 볼 때마다 신기하다. 그 안에 김치를 담으면 뭔가 더 먹음직스럽고 싱싱하게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일상이 고단하니 저녁에는 꼭 맥주나 와인 한 잔을 하게 되는데 그때 꺼내는 컵은 선물 받은 시다주쿠Shizuku 유리 글라스. ‘물방울’이란 뜻답게 아주 가볍고 ‘입술’의 두께도 극도로 얇아 술맛, 특히 와인향을 더 오롯이,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아침에는 보통 커피를 마시는데 차를 마시고 싶을 때는 그저 뜨거운 물을 끓여 담양에서 사온 차 거름망에 찻잎을 넣고 내려 마신다. 언뜻 대나무로 얼기설기 만든 것 같은데 볼수록 아담하고 섬세한 조형미가 있다. 차 마시는 시간에 더 공을 들일 수도 있지만 일상이 어디 그리 녹록한가. 나도 바쁘고 아이들도 바쁘고 이 정도로만 즐겨도 충분하다.

산업화가 가속화될수록 한쪽에서는 오롯이 손맛을 느낄 수 있는 제품이 각광을 받는다. 최근 공예품은 전례 없는 인기를 누리고 있다. 전남 장성군 차밭에서는 함께 모여 찻잎을 따고 차를 내려 다식과 함께 즐기는 <다함께 차차茶>가 열리고 서울대 도예과 학생들은 매년 공들여 만든 도자기를 아주 좋은 가격에 시장에 내놓는다. 작은 갤러리와 공방은 물론이고 국립현대미술관 같은 곳에서도 공예 전시를 기획, 선보인다. 매년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에서 선보이는 <공예주간>과 <공예트렌드페어>는 공예와 디자인 애호가들의 ‘성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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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곳에서 손맛 우러나는 작품을 보거든 차분히 잘 골라 집에 데려와 들여다보고 사용해 보자. 그 물건이 지닌 온기와 더불어 집의 시간이 한 뼘 즐겁고 산뜻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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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에 담긴 아빠의 진심

우리 아이들도 커서 이런 소소한 기쁨을 누리며 살았으면 좋겠다. 매일 밥상을 차리면서도 어떻게든 예쁜 물건, 좋은 물건을 꺼내는 아빠를 보며 터프한 첫째가 말한다. “아빠 뭐해? 그냥 대충 차려” ‘이왕이면 예쁜 그릇에 담아 자식 먹이고 싶은 애비의 마음을 그렇게 모르겠니?’ 하려다 ‘됐다, 됐어’ 하고 만다. 정말 모를 것 같아서. 그 나이에는 나도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살다 보니, 우연히 알게 됐을 뿐.

오늘도 밥상을 차린다. 피곤하지만 최선의 선택으로 그릇을 고르고 음식을 담는다. 습관적이고 관성적인 리듬으로 할 때도 많지만 어떻게든 힘을 내보려 한다. 코로나 사태가 다시 확산 위기를 맞으면서 2학기 정상 수업도 물 건너 갔다.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든 상황으로 내몰리는 분위기인데 저 기분 좋은 그릇과 살림 도구마저 없었다면 이 고난이 훨씬 길고 무겁게 느껴졌을 것 같다.

모던 파더 | 정성갑

초등학교 6학년, 초등학교 2학년 자녀를 둔 아빠. 집에 딸린 정원에서 시간 보내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 앞집, 옆집의 시야에 들지 않는 보일러실 뒤쪽 공간을 편애한다. 이곳으로 빛이 들어오는 정오 무렵, 약속이 없으면 바나나 우유를 홀짝이며 잠시 망중한을 즐긴다. 새벽 6시면 일어나 수성동 계곡으로 산책을 다닐 만큼 자연을 사랑한다. 월간 <럭셔리>와 네이버 디자인판을 운영하는 디자인프레스에서 문화 담당 기자와 편집장으로 20년 가까이 일했다. 지금은 한 점 갤러리이자 배티라이프콘텐츠 플랫폼인 클립을 운영하며 공예와 아트, 건축이 중심이 된 기사와 토크, 프로젝트를 선보인다.    

  • 2020.08.27
  • Editor. 김하민
  • Writer. 정성갑
  • Photographer. 정성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