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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yes — Issue 17. 사이의 세대

페이스북을 활용한 어떤 글쓰기

Writing on Facebook

  • 2020.07.28
  • Writer. 김민섭

최근 10년간 가장 잘한 일을 꼽으라면 ‘페이스북 계정을 만든 일’이다. 그러지 않았다면 내가 2015년부터 지금까지 5년 넘게 글쓰기로 생계를 영위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물론 페이스북이 유튜브처럼 조회 수나 팔로어 수에 따라 원고료를 지급하는 것도 아니고, 직접적인 수익을 낸 일도 없다. 내가 쓴 글에 1만 개 이상의 ‘좋아요’가 달리고 글이 수천 번 공유된다고 해도 그렇다. 아이들의 옷과 장난감을 사고 집세를 낼 수 있게 한 것은 인세와 강연료다. 그간 여섯 권의 책을 썼고, 네 권의 책을 기획하거나 만들었다. 독자들과 만나 글 쓰는 방식에 대한 강연을 했고, 신문이나 잡지에 글을 기고했다. 글을 쓰는 일로 계속 버티고 살아남을 수 있어서 기쁘다. 이 모든 활동은 사실 페이스북과 긴밀히 연계·연동되어 있다.

처음 페이스북 계정을 만든 것은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이하 《지방시》)라는 첫 책을 쓰던 2014년이다. 온라인 커뮤니티의 ‘고민 게시판’에 연재하던 것을 페이스북 페이지에 함께 올리기 시작했다. 커뮤니티의 게시판에서는 추천을 10개 이상 받아야 베스트 게시판에 등록되고, 그래야 글이 노출된다. 추천을 받지 못했을 때의 조회 수가 500이라면 추천을 많이 받았을 때의 조회 수는 5만이다. 공들여 글을 쓰는 것과 상관없이 몇 시에 글을 올렸는지, 그때 주목받을 만한 다른 글들이 올라왔는지, 나의 글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접속해 있는지 등에 영향을 받는 일이 많았다. 반면 페이스북은 나의 글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쓴 글이 높은 빈도로 노출되고, 그들의 친구들에게도 확장될 수 있는 방식이다. 나는 페이스북이 온라인 커뮤니티보다 훨씬 더 ‘확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부터 페이스북에 더욱 공들여 글을 썼다. 처음에는 ‘좋아요’ 반응 하나를 얻을 때마다 “만세!”를 불렀다.

《지방시》를 출간하고 나는 대학에서 나왔다. 대학 바깥에도 강의실과 연구실이 있고, 내가 마음먹기에 따라 누구든 나의 지도교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계속 대학에서 연구하고 강의할 수 없는 몸이 되기는 했다. 내가 그 책을 썼다는 것을 동료 연구자들과 학과 교수들이 알게 되었다. 스무 살부터 나의 청춘을 갈아 넣은 그곳에서 나오니 몹시 외롭고 막막했다. 연구실을 정리하고 며칠 뒤, “저는 오늘 대학을 그만둡니다”라는 A4 용지 두 쪽 분량의 글을 페이스북 페이지에 올렸다. 그건 잘한 일이었다. 하루 만에 130만 명 넘는 사람들에게 그 글이 노출되었다. ‘좋아요’ 반응이 1만3000개가 넘었고 공유와 댓글도 아주 많았다. 어느 정도였냐면, 1초에 한 번 새로 고침을 해도 최대치를 나타내는 20개의 알림 숫자가 표시되곤 했다. 팔로어 수는 6000명에서 2만 명이 넘었다. 그 숫자를 보면서 나는 조금은 외롭지 않아졌다. 내가 앞으로 어떤 글을 쓰든 그들이 나의 글을 읽어줄 것 같았다. 그들 모두가 나의 독자처럼 느껴졌다. 내가 이후 전업 작가가 되겠다고 선언하고 《대리사회》라는 책의 집필에 들어간 데는 그러한 이유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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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때부터 페이스북은 나의 글을 확장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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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사회》는 대리 운전을 하며 바라본 이 사회의 모습에 대한 책이다. 내가 그동안 나의 삶이 타인의 욕망을 대리하며 살아온 것이 아닌가 싶어서 ‘대리’가 들어간 일 당장 할 수 있는 노동을 찾아본 것이다. 나는 이 사회를 ‘거대한 타인의 운전석’으로 규정하면서 글을 써나갔다. 이번에는 페이스북이 아니라 카카오 스토리펀딩 플랫폼에서였다. 미리 절반 정도의 연재 글을 읽고 책을 사전 구매하거나 후원금을 낼 수 있게 했다. 3개월 동안 2000만 원 가까운 금액이 모인 데는 페이스북의 힘이 컸다. 나는 글이 올라오면 그것을 페이스북에 연동시켰다. 나중에는 내 돈을 들여 페이스북 광고를 태우기도 했다. 카카오 스토리펀딩에서는 누군가가 거기에 접속해 이것저것을 보다가 간신히 내 글을 읽을 수 있는 반면, 페이스북에서는 글이 관심 있을 만한 타인에게 확장되었다. 어느 정해진 범위가 아니라 여러 교집합을 타고 나의 글이 연결될 수 있다는 건 무척 매력적이었다. 광고 효과를 계산해보니 내가 1만 원을 사용하면 그 이상의 수익이 발생했고, 페이지의 팔로어도 늘었다. (그때의 광고 알고리즘이 더 많은 사람에게 도달했다고 들었다.)

《대리사회》 출간 이후 페이스북 메시지로 ‘강연 요청’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뿐 아니라 많은 작가가 인세 수입보다는 강연 수입으로 생계를 영위해나간다. 1만 부 이상 팔리는 베스트셀러는 거의 드물다. 우리가 이름을 아는 유명한 작가들도 사실 그렇게 책이 많이 팔리지 않는다. 1만 부를 판매해봐야 책의 정가를 1만3000원으로 잡았을 때 작가에게는 그 10%인 1300만 원이 지급되는 게 전부다. 적은 돈은 아니지만 1년에 한 권의 베스트셀러를 출간해도 평범한 직장인의 연봉만큼도 안 되는 것이다. 반면 지역의 도서관이나 학교, 독서 모임 등의 작가 초청에 응했을 때는 공공 기관을 기준으로 2시간 동안 30만 원 내외, 많게는 그 두 배의 강연료를 받는다. 30만 원이면 책을 300권가량 판매해야 받을 수 있는 인세에 해당하니, 작가로서는 그러한 초청이 고맙기 마련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 시기의 나는 “덕분에 이번 달의 생계비가 해결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초기 강연 요청의 반은 페이스북 메시지를 통해서 왔다. 그들은 페이스북 말고는 나와 연락할 방법을 알지 못했고, 대부분 나의 글을 찾아서 보던 페친들이었다. 페이스북에 꾸준히 글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 어딘가에 있을 독자들에게 “저는 김민섭이라는 사람입니다. 계속 글을 쓰고 있습니다. 저를 읽어주세요. 그리고 저를 불러주세요” 하고 요청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시기의 나는 망망대해에 앉아서 정말로 낚시하는 기분이 들곤 했다. 글을 써서 페이스북이라는 바다에 던져두면, 독자들이 그것을 읽고 내 곁으로 온다. 어느 날은 수백 명의 팔로어가 새로 생겼고 어느 날은‘좋아요’반응 몇 개를 받는 게 고작이기도 했다. 강연 요청 같은 직접적 반응이 오는 날은 드물었지만, 누군가와 연결될 수 있다는 그 감각 자체로 참 좋았다.

1993년생 김민섭 씨 찾기 프로젝트

페이스북을 단순한 도구 이상의 무엇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김민섭 씨 찾기 프로젝트’ 이후다. 2017년 12월에 생애 첫 해외여행을 위해 후쿠오카 왕복 항공권을 구매해두었는데, 둘째 아이의 수술 날짜가 출국일과 겹쳐 포기하게 되었다. 그게 환불이 안 된다고 하기에 양도하려고 하니 여행사에서는 1) 대한민국 남자이고, 2) 이름이 김민섭이고, 3) 여권의 영어 스펠링이 모두 같은 사람을 찾아오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페이스북에 “김민섭 씨를 찾습니다. 후쿠오카 왕복 항공권을 드립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그리하여 나와 열 살 차이 나는 1993년생 김민섭 씨와 만나게 됐다. 대학생인 그는 졸업 전시 비용이 부족해 휴학하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때 어느 고등학교 교사가 페이스북으로 메시지를 보내왔다. “괜찮다면 제가 김민섭 씨의 숙박비를 부담하고 싶습니다.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 중에는 형편이 어려워 항공권을 준다 해도 가지 못할 경우가 많은데, 어딘가에 있을 김민섭 씨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서 돕고 싶습니다”라는 것이었다. 누군가는 유효기간이 한 달 남은 후쿠오카 그린 패스권 두 장을 보내준다며 교통비를 후원해오기도 했고, 누군가는 자신이 와이파이업체 대표인데 무료로 렌트해주겠다며 통신비를 후원해오기도 했다. 결국 카카오에서 이 사연을 스토리펀딩에 올려 1993년생 김민섭 씨의 여행비는 물론 졸업 전시 비용까지 마련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시작은 환불받을 수 없는 항공권을 양도하겠다는 작은 데서부터였지만, ‘프로젝트’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여야 할 만큼 일이 커지고 말았다. 1993년생 김민섭 씨는 출국하며 나를 만난 자리에서 “작가님이 1983년생이고 제가 1993년생이잖아요. 언젠가 2003년생 김민섭 씨를 찾아서 꼭 아무 조건 없이 여행을 보내주겠습니다. 잘 다녀올게요” 하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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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때 이러한 연결의 가능성이 우리 세대가 세계를 감각하게 해주는 방식인 것을, 느슨하지만 결코 끊어지지 않을 이 가느다란 줄이 우리를 지탱해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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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 김동식이라는 작가의 책 《회색인간》을 기획하면서도 페이스북의 모든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 메시지가 그 책이 베스트셀러에 진입하는 데 작은 기여를 했고, 나의 신간이 나오기 이전 사전 연재 비슷한 것을 페이스북의 개인 계정을 통해서 지속했다.

글 쓰는 사람 김민섭의 콘텐츠 플랫폼

페이스북은 긴 글을 올리고 그것을 확장시키기에 가장 좋은 플랫폼 중 하나다. 작가뿐 아니라 콘텐츠를 생산하는 모든 개인은 이러한 플랫폼을 적절히 이용하면서 자신을 알려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방식이 얼마나 지속 가능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사실 의문이다. 30대인 작가 A는 나에게 “언젠가부터, 페이스북에서 우리가 제일 막내더라고요. 20대는 모두 어디로 갔을까요?” 하고 물었다. 그러고 보니 주로 40대나 50대가 많았고, 30대 중반이면 대단히 젊은 편이었다. 사실 우리 모두 그 답을 알았다. 10대부터 30대 초반의 연령이 인스타그램으로 갔을 것이다. 거기에 가면 우리는 나이가 많은 편이다. A와는 우리도 인스타그램으로 가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을 나누다가 결국 우리와는 잘 안 어울린다는 결론을 내고 말았다. 사진을 찍는 데는 별로 소질이 없고, 긴 글을 쓰기에는 불친절한 플랫폼 같다고 말했다.

페이스북에 올릴 글도 조금씩 소진되어갔다. 매번 어떤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모든 이슈에 의견을 내는 것도 별로 멋진 일이 아니다. 일상을 공유하는 일도 반복되면 눈치가 보인다. 나의 경우는 아이들과의 일상이라든가, 운동을 하는 경과라든가, 독자들을 만나는 근황이라든가 하는 것들을 주로 올렸다. 그중 아이들 이름 뒤에 ‘씨’라는 호칭을 붙인 “68개월 김대흔 씨는 오늘도 나에게 씨름을 하자고 했다” 유의 게시물을 좋아했고, 페친들은 나를 만나면 “아이들과의 근황 잘 보고 있습니다. 김대흔 씨는 잘 지내죠?글 좀 더 올려주세요”하곤 했다. 육아 일기를 책으로 내자는 제안도 많이 들어왔다. 아이들과 함께하며 피어오르는 어떤 사랑스러움과 분노와 안타까움 등을 ‘부글부글’이라는 단어로 표현한 것이 재미있다고 했다. 운동을 하고 있다는 글에는 “저도 자극이 되네요. 함께하겠습니다”와 같은 댓글이 많이 달렸다. 독자들과 만나고 있는 사진에는 “저도 작가님을 초대하고 싶네요”와 같은 댓글이 달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한 일상의 공유가 결국 나의 소진을 고백하는 일처럼도 보이는 것이다. 누군가는“아, 김민섭 그 작가는 이제 그냥 애 키우는 사람이던데”라고 하거나, “다이어터야 뭐야. 뭐 하는 사람이야”라고 하거나, “강연하러 다니는 사람이지 작가가 아니야”라고 할 것만 같다. 타인과 연결될 수 있는 플랫폼이라는 것은 그 안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고 동시에 자신이 팔로할 만큼 매력 있는 개인이라는 것을 노출해야만 결국 그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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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아무 맥락 없이 올리는 것처럼 보이는 여러 글도 내가 어떻게 보일 것인가를 고민한 결과물이다. 연결이라는 새로운 시대의 가치는 타인을 감각하는 느슨하면서도 섬세한 여러 고민에서 확장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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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의 동 세대 작가들과 함께 계속 페이스북이라는 플랫폼을 이용하게 될 듯하다. 물론 긴 글을 쓰기에 더욱 적합한 어떤 플랫폼이 계속 나올 것이고 그에 따른 이주를 경험하게 될지도 모르겠으나, 그건 그때 가서 자연스럽게 선택할 일이다. 우선은 그때도 여전히 글 쓰는 사람 김민섭으로서 계속 생존하고 싶다. 그리고 나의 아이가 글을 쓰고 읽고 자신을 표현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페이스북에 그의 이야기를 종종 남기려고 한다.

2020년 4월 13일 오후 2:25 김민섭 페이스북

일곱 살 김대흔 씨는 지난주 며칠 동안 서울의 할머니 집에서 지냈다. 내가 밤늦게 들어온 지난 금요일에 그는 할머니 옆에 누워서 자고 있었다.‘잘 자고 있구나’ 하고 들어가다가 주방에 먹다 남은 치킨이 보여서 먹고 있으려니까, 어머니가 나에게 “대흔이가 먹다가 아빠 치킨 남겨놨냐고 물어보더라” 하고 말씀하셨다. 나와 치킨 너깃 하나 더 먹겠다고 젓가락으로 싸우면서도 어느덧 김대흔 씨는 ‘아빠도 치킨 좋아하는데...’ 하고 떠올릴 만큼 자랐다.

자기 전에 불을 끄려고 하자 “그러면 아빠가 어두워서 어떻게 와. 불을 켜 두자”라고 했다고도 한다. 내가 자란 서울 성산동 집은 성미산의 서쪽 자락에 있다. 늦은 밤에 언덕을 오르다 보면 불이 켜진 그 집이 꼭 등대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때는 어머니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김대흔 씨가 함께 있었다. 나는 누군가를 위해 불을 밝혀둔 기억이 별로 없는데, 식은 치킨을 먹다가 괜스레 목이 메었다. 덕분에 부글부글. 화가 나서가 아니라 마음이 따뜻해져서 부글부글.

오늘 아침엔 김린 씨 밥 먹이느라 잠시 방심한 동안 내 그릇에 아껴둔 너깃이 사라졌다. 내 자리까지 어느새 다가온 김대흔 씨가 자신의 입에 너깃을 넣고 있었다. 마지막 한 입 맛있게 먹으려고 아껴둔 것이었는데, 역시 부글부글.

김민섭

첫아이가 태어난 날 대학을 나와 4대 보험을 제공하는 맥도날드에서 물류 하차 노동자로 일했다. 그 경험을 담은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를 썼고, 《대리사회》, 《훈의 시대》를 출간했다. 사회적 관계망과 개인적 기록, 그 경계를 넘나드는 소통의 도구가 되는 페이스북 글쓰기를 즐기며, 단행본 기획자로, 독자와 작가를 연결하는 작가 초대 플랫폼 북크루 대표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 2020.07.28
  • Writer. 김민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