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모두가 잠든 밤 마시는 맥주는 위스키를 닮았다.

A Beer-drinking Midnight

물씬 풍기는 로스티드 코코넛과 메이플 시럽 향이 매혹적인 밤은 위스키를 닮았다

  • 2020.07.29
  • Editor. 조서형
  • Writer. 박진수
  • Photographer. 박진수

야근이 잦은 업종을 택한 아침형 인간에게 여유로운 밤은 흔치 않다. 이 소중한 밤을 놓치지 않기 위한 모던 파더 박진수의 픽은 옴니폴로의 중후한 맥주, 로렐라이다. 물씬 풍기는 로스티드 코코넛과 메이플 시럽 향이 매혹적인 밤, 오늘의 맥주는 위스키를 닮았다.

나는 영상업에 종사하는 아침형 인간이다.

내가 늦잠을 자는 일은 좀처럼 없다. 일반 사무직에서 영상 일로 갈아 탄 지 9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해가 뜰 무렵인 6시면 자연스럽게 눈이 떠진다. 편집하느라 밤을 꼴딱 새우거나 새벽부터 촬영을 시작하는 ‘나인 투 식스’의 근무가 어려운 업무 특성임에도 그렇다. 반복되는 수정 작업을 거치느라 퇴근이 늦거나, 부족한 수면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이른 저녁부터 잠자리에 드는 일이 많기에 늦은 밤, 집에서 보내는 혼자의 시간은 드물다.

들쭉날쭉한 퇴근 시간 탓에 저녁 식사 시간을 맞추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런 날이면 눈치껏 끼니를 챙긴다. 자연스럽게 맥주도 곁들인다. 잠든 아이가 깰까 조심스레 캔을 따서 잔에 따른다. 그리고서 크게 한 모금. 황홀하다. 이게 바로 천국의 맛일까. 맥주를 마시기 위해 퇴근 몇 시간 전부터는 물도 마시지 않고 참는다. 땀을 많이 흘리는 여름이면 으레 갈증을 해소할 가벼운 맥주를 찾는다. 카스, 테라, 버드와이저 등의 페일 라거는 근처 편의점 등에서 구하기도 쉽다. 이 경우 한 캔으로 끝나지 않을 때가 많다.

퇴근이 늦어 이미 피곤하기 때문에 가벼운 맥주 여러 캔보다 바디감 있는 맥주 한 잔이 좋겠다. 선선하고 비 내리는 요즘 같은 날씨에는 묵직한 임페리얼 스타우트 혹은 포터가 제격이다. 이 둘은 위스키를 담갔던 버번 오크통에다 만든 맥주로 위스키의 향을 그대로 담고 있다. 일반 맥주가 4~5도인 것에 비해 이들은 10~15도의 높은 도수를 가졌다. 이런 스타일 맥주의 가장 큰 묘미는 독하거나 쓴맛을 느끼지 않고도 한 병에 알딸딸해진다는 것. 냉장고에서 막 꺼내 시원하게 즐기기보다 상온에 어느 정도 놓아두고 천천히 마시면 더 깊은 향과 맛을 즐길 수 있다. 고민하다 선택한 오늘 마실 맥주는 바로 옴니폴로의 로렐라이.

스웨덴 맥주 브루어리 '옴니폴로(Omnipollo)'
옴니폴로의 다양한 맥주병 라벨 디자인

날 부르는 맥주, 로렐라이

스웨덴의 맥주 회사인 옴니폴로는 양조장을 가지고 있지 않다. 대신 양조하는 사람, 양조사가 있다. 이런 구조의 회사를 집시 브루어리라 부르는데, 보통 양조장이 있는 회사와 협업을 통해 위탁 양조를 한다. 옴니폴로는 제과사를 꿈꾸던 양조사 헤녹 펜티(Henok Fentie)와 데님 브랜드 칩 먼데이(Cheap Monday)의 로고 디자인으로 유명한 아티스트 칼 그란딘(Karl Grandin)이 공동으로 설립했다. 아이스크림, 피칸 케이크, 메이플 시럽 등 디저트에서 영감을 받은 독특한 향의 맥주가 특이한 라벨 디자인을 한 병에 담긴다.

로렐라이는 로스티드 코코넛과 메이플 시럽이 들어간 맥주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 식자재지만 맥주와 조합은 훌륭했다. 코로 먼저 찐득한 메이플 향이 강하게 느껴진다. 뒤이어 코코넛과 위스키의 향이 균형 있게 퍼진다. 걸쭉하면서도 달다. 위스키의 싸한 맛이 날 무렵 단맛이 이를 적당히 잡아준다. 다크 초콜릿 같은 향도 은은하게 느껴진다. 로렐라이는 첫 모금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새로운 수준의 맥주다.

로렐라이 맥주가 담긴 병에는 얼핏 황금 빗 모양의 라벨이 그려져 있다. ‘로렐라이’는 사실 독일의 한 기슭에 솟아있는 바위의 이름이다. 이 바위에는 노래를 부르는 인어가 사는데, 목소리로 뱃사람을 매혹한 다음 배를 난파한다는 전설이 있다. 얼핏 보니 황금 빗이 인어의 실루엣 같기도 하다. 옴니폴로의 로렐라이는 당근슈퍼, 크래프트로브스 바틀샵, 세브도르 등에서 판매하고 있다.

어찌 됐건 하루를 마감하는 시간은 뿌듯하다. 들뜬 마음으로 LP판을 틀고 맥주 앞에 앉는다. 찐득한 재즈 음악이 흘러나온다.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맥주를 단숨에 따른다. 진한 검은색 액체 위로 짙은 갈색의 거품이 살풋 놓인다. 이렇게 보니 검은 맥주는 다른 어떤 음료보다 매력적이다. 귀로는 음악을 듣고 눈으로는 병에 그려진 라벨을 바라본다. 그리고 한 모금씩 맥주를 입에 머금었다 삼킨다. 이래서 선원을 유혹하던 인어의 이름을 따 맥주의 이름을 지은 것이군. 홀린 듯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시고 나자, 하루가 온전히 마무리되는 것 같다.

모던 파더 | 박진수

TV 광고, 뮤직비디오, 바이럴 영상, 기업의 유튜브 콘텐츠를 제작하는 ‘이안 프로덕션’의 대표. 맥주가 술을 넘어 문화가 될 날을 바라며 맥주 문화 행사 기획사 ‘비어스픽’을 운영했다. 비어스픽은 접었지만, 여전히 요리보다 맛있고, 영화만큼 흥미로운 다양한 맥주와 문화 콘텐츠를 사람들에게 전파하고 있다. 6살, 8살 장난꾸러기 아들 둘을 둔 아빠로 좋아하는 브랜드를 사고, 입고, 먹는 것에 즐거움을 느낀다. 박진수가 추천한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캔 맥주 이야기는 ‘나 홀로 홈캉스에 어울리는 편의점 맥주’에서 볼 수 있다.
  • 2020.07.29
  • Editor. 조서형
  • Writer. 박진수
  • Photographer. 박진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