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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traits — Issue 3. 사춘기

유령의 시간, 대리의 시간

Living as a Ghost

  • 2016.11.04
  • Editor 최혜진
  • Photo 이주연
  • Film 최소명

김민섭은 오랫동안 “선생님” 혹은 “교수님” 혹은 “강사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리어왔다. 석사 1기부터 박사 4기까지 대학원 과정생일 땐 매 학기 조교로 일했다. 학과 행사 준비부터 온갖 서류 작업까지 도맡는 전천후 잡부 생활이었다. 하지만 등록금은 언제나 조교 장학금의 총합보다 높았다. 안간힘을 다해 박사 과정을 마치고 시간 강사가 된 뒤엔 한 학기에 6~8학점의 강의를 했다. 강의실에서는 허울 좋은 젊은 연구자이자 교수님이었지만, 그가 대학에서 닥치는 대로 노동하고 받는 돈은 연봉 천만 원 남짓이었다.

아들이 태어나던 날, 대학이 지원해주지 않는 건강 보험을 해결하기 위해 그는 “딜리”라는 새로운 호칭을 선택했다. 주2 일은 대학에서 강의하고, 주 4일은 맥도날드에서 물류하차 일을 했다. 최저시급, 주휴 수당, 4대 보험 등 노동법이 정해놓은 바를 따르는 맥도날드에서 일을 하고 나서야 착취가 일상화된 대학의 맨 얼굴, 그리고 ‘교수’라는 호칭에 취해 대학 언저리를 배회하는 유령과도 같았던 자신의 과거를 인식하게 됐다. ‘309동 1201호’라는 필명으로 인터넷 커뮤니티에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라는 글을 연재했고, 글마다 수백 개의 댓글이 달리며 폭발적인 반응이 이어졌다. 2015년 동명의 책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가 출간된 뒤, 그는 대학이라는 ‘갑’이 아니라 같은 ‘을’ 처지에 있던 연구실 동료들의 원망과 질책을 들어야 했다. 그날 그는 대학에서 나왔다.




이제 그는 ‘누구라도 내 인생의 지도교수가 될 수 있다’는 자각을 가지고 넓은 세상을 활보한다. 최근에는 대리운전 기사로 일하며 <대리사회>라는 책 출간을 준비하고 있다. 타인의 운전석에서 부조리가 일상화된 세상을 응시하고 기록한 르포르타주. 김민섭은 대학 강사에서 맥도날드 딜리로, 인문학 작가로, 다시 대리운전 기사로 정체성을 쉼 없이 바꾸고 있지만, 주체적인 삶의 가능성이라는 화두만큼은 결코 놓지 않는다. 작고 여린 아들의 탄생이 그에게 일깨운 건 타인의 욕망을 대리하며 사는 일의 부끄러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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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는 맥도날드에서 아르바이트하는 대학 강사 이야기로 유명세를 탔습니다. ‘맥도날드’와 ‘대학’이라는 이질적인 두 공간을 비교하니 대학의 위선이 더 생생하게 와 닿았어요. 
제가 맥도날드에서 일하기로 한 건 아들이 태어난 2년 전 어느 여름날이었습니다. 산부인과 병실에서 잠든 아내와 아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밖으로 나왔습니다. 나오면서 되뇌었습니다. 뭐든 해야 한다, 특히 건강보험을 보장해주는 일이라면 그 어떤 노동이라도 해야한다고요. 대학은 시간 강사에게 직장 건강보험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는 그 순간까지도 저는 퇴직한 아버지 밑에 등록된 ‘피부양자’였죠. 거리로 나와 10분쯤 정처 없이 헤맸는데 눈앞에 ‘사람 구함. 4대 보험 보장. 새벽부터 오전까지 근무. 주 4일 출근’이라고 적힌 구인 공고가 보이더군요. 마침 강의가 없는 요일만 일하면 되었습니다. 뭐에 홀린 사람처럼 매장 안으로 들어가 일을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곳이 맥도날드였습니다. 그날부터 1년 3개월 동안 물류 하차 일을 했습니다. 새벽에 출근해 점심시간 무렵까지 냉동, 냉장 상자 150여 개를 내리고 올린 뒤, 강의 시간이 되면 곧바로 학교로 가 강의를 했습니다. 강의가 끝나면 대학 연구실에서 또 연구했고요.

책에 ‘지식을 만드는 공간이 햄버거를 만드는 공간보다 사람을 더 위하지 못한다’라고 쓰셨는데, 어떤 순간에 그걸 느꼈나요? 
맥도날드에서 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가 점장에게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왜 이렇게 저에게 잘 해주세요?” 4대 보험을 보장해주고, 초과 근무 수당이나 주휴 수당 등도 챙겨주는 게 진심으로 의아해서 물은 겁니다. 대학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니까요. 점장은 짧게 대답했습니다. “저희는 법을 지키는 것뿐인데요?” 일례로 제가 대학에서 조교 일을 하다 다친 적이 있습니다. 밀차에 책을 가득 넣고 옮기다가 발목이 부딪혀 뼈가 보일 정도로 심하게 피부가 찢어진 사고가 있었어요. 연구실 선배들, 강사 선배들 모두 현장에서 그 모습을 봤죠. 하지만 저는 혼자서 운전을 해서 응급실로 가서 제 돈을 내고 봉합 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대학에선 노동하다 다쳐도 그에 합당한 대처가 없었습니다. 똑같이 맥도날드에서 물류 하차를 하다 넘어져 팔꿈치를 다치는 일이 있었어요. 저는 매니저가 알게 되면 괜히 시끄러워질까 봐 다친 걸 숨기고 있었고요. 그런데 어떻게 소식을 들은 매니저가 깜짝 놀라며 저를 데리고 지정된 병원으로 가서 법인 카드로 치료비를 결제해주었습니다. 2주 정도 푹 쉬라고 휴가를 내주었고, 쉬는 동안 치료를 받을 일이 생기면 매장에 들러 법인 카드를 들고 가서 치료받으라고 지시했습니다. 똑같이 일하다 다쳤는데, 대학과 맥도날드의 대처 방식이 너무나 달랐습니다. 저는 대학의 지식 노동과 맥도날드의 육체노동 사이에 귀천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햄버거를 만드는 공간보다는 지식을 만드는 공간이 사회와 구성원에 대해 조금은 더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책임조차도 맥도날드가 더 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되지 않았다면 지금 어떤 삶을 살고 계실까요? 
아마 여전히 대학에서 연구자로 살아가고 있을 겁니다. 아들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연구자가 아니라 한 사람의 사회인이자 아버지로서 내 아이와 마주해야겠다고 다짐했고, 그 덕에 맥도날드 아르바이트 등 대학교 바깥에서의 노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 노동 경험이 괴물 같은 대학 공간의 참모습을 보게 도왔고요.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가 출간된 뒤, 저는 대학에서 나왔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이 저에게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대학에 남아있어야지” 라고 말했어요. 하지만 저는 아이를 위해 나오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대학의 불합리함을 알면서도 거기에 남아서 침묵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와 맞서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대학에서 도망친 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불합리함과 맞서는 중입니다. 무엇보다 제 아이에게 부끄러워지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흔히 “아이 때문에 참는다. 아이 때문에 이렇게 한다”고 하잖아요? 저는 아이 때문에 참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나중에 제 아이가 글을 읽을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제가 쓴 글들을 꼭 아이에게 주고 싶습니다.

책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를 읽다 보면 아내와 아들을 건강보험 피부양자로 등록하지 못하는 가장, 평생 노동하신 부모님을 피부양자로 등록하지 못하는 아들의 참담함이 절절하게 느껴집니다. 한국의 30대 가장에게 4대 보험은 무엇을 상징하나요? 
꼭 남자가 아니더라도 한국에서 가장으로 살아간다는 건 가족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까지 마련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대학에서 저는 계속 노동했지만, 근로기준법이 정해놓은 안전망을 보장받은 적이 없습니다. 제 가족 역시 마찬가지였고요. 4대 보험은 공기처럼 당연한 존재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보장받고 있을 때는 잘 모릅니다. 받을 수 없는 때가 되면 마치 자신이 사회인이 아닌 것 같은 무력한 기분에 휩싸이게 되죠. 사회에서 열심히 일하면서 살아가지만 사회구성원으로서는 존재할 수 없는 유령 같은 존재가 됩니다. 가장으로서 가족을 위한 사회적 안전망을 마련하지 못한다는 건 가족을 유령으로 만드는 일과 다름없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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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로서의 입지가 어느 정도 생겼는데 갑자기 대리운전기사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육체노동을 하느라 시간을 쪼개 쓰지 않고 오직 글만 쓰는 삶을 딱 1년만 살아보려고 했어요. 아내에게도 1년의 시간을 허락받았죠. 그런데 시간이 생겼는데 오히려 글이 안 써지더군요. 대학과 맥도날드에서 일하면서 글을 쓸 때보다 글감도 떠오르지 않고, 써내려가는 속도도 붙지 않았습니다. 몇 달을 허비하고 나서야 글은 책상 앞에 앉아 쓰는 것이 아니고 살면서 노동하면서 삶으로 쓰는 거란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책을 덮고 다시 거리로 나가 대리운전 기사 면접을 봤습니다. 노동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어주고 타인의 처지에서 사유하게 하는 힘이 있어요. 제가 맥도날드 물류하차를 하며 깨달은 놀라운 점 중 하나죠.

신간 <대리사회>에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등장합니다. 대리기사 일을 처음 시작한 날을 회고한 것인데요. 대리 첫 손님이 “아저씨,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라고 작가님을 ‘아저씨’라고 부를 때, 그간 느끼지 못한 홀가분함을 느꼈다는 회고였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교수님”보다 “대리 아저씨”라는 호칭이 자존심 상할 것 같은데, 이 반전의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대학에서 들었던 ‘교수님’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은밀하게 저를 고양시켰습니다. 4대 보험이 보장되지 않는 4개월짜리 계약직 노동자이면서도 대학의 진짜 일원인 양, 주체인 양 착각하게 만들었어요. 우리는 어디에서든 이름이 아닌 호칭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리, 차장, 부장, 조교, 강사, 교수… 이러한 호칭은 사람을 취하게 하는 면이 있습니다. 내가 나로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호칭으로서만 존재하고 여차하면 호칭이 나를 밀어내기도 해요. 군대를 떠올려보면 됩니다. 군대에선 절대로 ‘내가’ ‘누구누구 씨가’라고 이름으로 말하지 않고, ‘소대장이’ ‘포반장이’ ‘중대장이’ 이런 식으로 직급으로만 서로를 호명합니다. 개인의 욕망과 주체성을 이런 호칭들로 없애버리는 거죠. 대리 손님께서 “아저씨!”라고 저를 불러주는 순간 허울뿐인 호칭에 취해있던 제 과거가 깨지는 느낌이 들었고, 홀가분함을 느꼈습니다.

“흔히 '아이 때문에 참는다. 아이 때문에 이렇게 한다'고 하잖아요?
저는 아이 때문에 참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제 아이에게 부끄러워지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조직원으로 살아갑니다. ‘원래 다 그런 거야’라는 말로 서로를 적응시키는 일도 빈번하고요. 자신의 삶이 주체적인지 아닌지 점검해보고 싶을 때, 스스로 어떤 질문을 던져보면 좋을까요? 
저는 대학에 있는 동안 대학을 대단히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공간으로 믿었습니다. 늘 ‘나는 연구하며 별 탈 없이 잘 지내고 있다’ ‘나는 이 공간의 주체다’라고 생각했죠. 특히 대학과 곧잘 연결되는 진리, 자유, 지성 등의 단어가 주는 힘이 있어서 더 착각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대학의 진짜 얼굴을 보게 된 건 그곳에서 밀려난 뒤였어요. 저는 대학에 있는 동안 스스로 ‘이곳에서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인간이 수년간 일하면서 그런 중요한 질문을 한 번도 하지 않았으니 정말 부끄러운 일이죠. 한국 사회는 밀려나기는 정말 쉽습니다. 그런데 물러나기는 너무 어렵습니다. 우리는 경쟁적으로 어떻게든 나아가는 것만 배웠고, 스스로 물러나는 힘을 길러본 적은 없어요. 물러난다는 건 ‘나는 여기에서 누구인가. 이 공간은 나에게 무엇인가’를 질문하고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내가 속한 조직을 비판적으로 말하는 타인을 만났을 때 무작정 그를 나쁜 사람 만드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떤 맥락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을까 생각해본다는 뜻입니다. 그의 입장이 되어 내가 속한 공간을 바라볼 줄 안다는 뜻입니다. 주체가 아니라 대리로, 유령으로 사는 사람들은 조직에 대한 비판을 자기 자신에 대한 비판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아요. 김치 냄새가 싫다고 말하는 외국인에게 ‘너는 우리를 모욕했어’라고 반응하는 사람이 그 예가 될 수 있겠죠. 자신이 속한 조직, 사회, 국가와 자신을 별개로 놓고 사유하는 게 필요합니다. 조직과 자신을 별개로 두고 사유할 때, 우리는 물러서는 힘을 갖게 되고 괴물에 잡혀먹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대리사회>에서 아내에 관해 쓰면서 ‘다시 한 번 내 역할에서 도망쳐 나왔다. 글쓰기와 대리운전으로 번 돈을 꼬박 생활비로 부치고는 있지만, 그것은 내가 맡아야 할 여러 역할 중 일부이고 가장 간편한 방식이기도 하다”고 쓰셨습니다. 가장이 돈 잘 벌어오면 된다고 믿었던 가부장적 세계관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말씀입니다.
아들이 태어나고 한번 육아로부터 도망친 적이 있어요. 아내에게 ‘1년 이내에 논문을 완성하지 못하면 대학에서 정규직 자리를 얻기 힘들 것이다, 나는 연구를 해야 하니 당신이 아이를 봐라’라고 말하고 도망친 거죠. 그렇게 연구실에 앉아있는데 부끄러운 기분을 씻을 수가 없었어요. 매일 밤늦게 집에 돌아오면 아내가 “여보, 오늘은 아이가 걸으려고 시도했어.” “오늘은 아이가 기었어.” “오늘은 아이가 제 힘으로 몸을 뒤집었어.”라고 이야기해주는 걸 듣기만 할 뿐 아이가 성장하는 순간에 옆에 있어 준 적이 없는 아빠라는 사실이 참 부끄러웠습니다. 배우자와 가족에게 내가 앞으로 교수가 될 테니 시간을 견뎌달라고 말하는 것, 내가 얼마를 벌어올 테니 짐을 혼자 져달라고 요구하는 게 옳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렀어요. 연구실에서 다시 집으로 와서 논문 쓰는 시간을 줄이고 아이가 커가는 모습을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대학을 아예 그만두고는 아이와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고요. 아이와 함께 있던 어느 날, “엄마” “아빠” “물”까지만 말할 줄 알던 아이가 “빵!”이라고 또렷하게 말하는 거예요. 아이가 제 스스로 새로운 말을 익히는 기적 같은 순간을 목도한 것이 그 어떤 사회적 성공보다 좋았습니다. 

“한국 사회는 밀려나기는 정말 쉽습니다. 그런데 물러나기는 너무 어렵습니다. 우리는 경쟁적으로 어떻게든 나아가는 것만 배웠고, 스스로 물러나는 힘을 길러본 적은 없어요. 물러난다는 건 ‘나는 여기에서 누구인가. 이 공간은 나에게 무엇인가’를 질문하고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결혼과 출산을 하면 삶이 더 힘들어질 거라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말씀을 해주시는지 묻고 싶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결혼과 출산을 미루는 이들을 비판할 순 없습니다. 가장 해주고 싶은 건 위로와 격려예요. 내년 3월에 둘째 ‘미래’가 태어납니다. 대리운전하고 글을 쓰면서 가족을 부양하고 있는 지금, 저는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고 즐겁습니다. 무슨 일을 해서든 내 가정을 꾸려갈 수 있을 것 같고, 그 나날들을 상상해보는 것만으로 즐거워요. 아이를 위해 내 인생을 희생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아이 덕분에 저는 한 사람의 주체가 되었습니다. 며칠 전, 뜀박질에 막 재미를 붙인 아이가 공터에서 왕복 달리기를 계속하는 거예요. ‘네가 언제 어떻게 무엇을 하며 달리든 아빠는 이렇게 옆에서 함께 뛰어줄게’라고 속으로 아들에게 말하며 아이 곁에서 같이 뛰는데 눈물이 날 것 같았습니다. 결혼과 출산을 두려워하는 분이 있다면 결혼과 출산을 해도 충분히 즐겁다고, 아이와 교감하는 순간이 충만한 기쁨과 행복을 선물한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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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1.04
  • Editor 최혜진
  • Photo 이주연
  • Film 최소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