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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eas — Issue 15. 부부위기

Present

Present

  • 2020.01.06
  • Editor 김경민
  • Photo 이주연

위기가 찾아올 때 꺼내보고 싶은 부부의 시간이 담긴 선물에 관한 이야기.

15-06-01

스무 살 나는 남편의 뒷모습만 좇는 일방통행 사랑을 했다. 부지런히 나만 당신을 쫓아다니고 손해 본 사랑. 아이들이 꺼낸 먼지 쌓인 편지들을 모아 책을 만들었을 때, 그는 “내가 이렇게 혼자서만 당신을 좋아했다”라고 우리를 회상했다. 책 속의 남편은 ‘남하’, 나는 ‘희’다. ‘남하’에게 답장을 쓸 때 나는 항상 편지 말미에 ‘별을 좋아하는 소녀’라고 적었다. 연애는 8년, 결혼은 27년. 35년의 인생을 함께했음에도 우리는 여태 서로를 모른다.

— 희: 별을 좋아하는 소녀, 결혼 27년 차, 주부


15-06-02

결혼 10주년은 좀 특별해야 할 것 같은 강박이 들었다. 반지나 명품 가방을 대신할, 우리 가족 모두에게 기억에 남을 만한 선물을 곰곰이 생각했다. 그렇게 짙은 분홍색 시트의 의자가 우리 집에 왔다. 식탁 의자가 되었다가, 서재 의자도 되고, 집 안 어디에 두어도 묻히지 않고 공간을 빛내고 있다. 어느 날 아이가 장난을 치다 등받이가 부러져 큰 수리 비용을 들여 고쳤는데, 문득 그 모습이 우리 부부를 보는 것만 같았다. 세월의 흔적과 상처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우리 곁에 있는 이 의자를 여전히 무척 아끼고 사랑한다.

— 손현경, 결혼 13년 차, 에어비앤비 운영


15-06-03

어느 크리스마스였다. 가구 디자이너인 남편이 나무를 깎아 루돌프의 코와 뿔을 만들고, 이것을 오토바이 헬멧에 붙여 크리스마스 특별판 스피커를 만들어 선물했다. 헬멧을 쓰고 나타난 남편 머리 주변으로 크리스마스캐럴이 울려 퍼졌다. 루돌프 뿔에는 블루투스 스피커가 들어 있었으니까. 세상에 없는, 단 하나의 선물을 나를 위해 준비했을 남편의 마음을 생각하면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뿔이 부러져 음악을 듣지 못한다. 해맑게 웃던 남편의 얼굴과 귀여운 몸짓을 생각하며 지금도 슬그머니 미소 짓는다.

— 박현정, 결혼 5년 차, 디자이너


15-06-04

구스타프 클림트의 ‘The kiss’ 미니어처 조각상은 남편이 내게 준 첫 생일 선물이다. 미대 출신인 나를 생각해 고심 끝에 골랐다는 이 물건을 선물 상자에서 꺼냈을 때 당혹감은 지금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실 울 뻔했다. 진지하게 친구를 붙잡고 고민 상담도 했다. 우리의 어여쁜 신혼집에 이 희귀한 물건을 둘 순 없다며 결혼하면서 슬그머니 친정에 두고 왔는데, 남편은 그렁그렁한 눈으로 서운함을 숨기지 못했다. 지금은 서재 한쪽에 고이 모셔두었다. 그 조각상을 볼 때마다 결혼이란, 내 취향이 아닌 조각상을 서재 한쪽에 두고 사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올해 결혼 6주년, 기념일이 다가올 때마다 조마조마해진다.

— 김보람, 결혼 6년 차, 리빙 숍‘피스카 피스카’운영


15-06-05

남편에게 신혼여행 중 서핑보드를 사주겠다는 약속을 했다.뉴욕 신혼여행 내내 수동적 모습을 보이던 남편은 LA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서핑 숍으로 향했다. 호텔에 짐도 풀지 않은 채 첫 보드 쇼핑을 했다. 첫날은 이해했다. 문제는 다음 날이다. 역시 일정 내내 시큰둥하더니 서핑 숍에 들어가서야 눈을 반짝이며 또 하나의 보드를 골랐다. “고마워! 내 선물은 이걸로 할게”라며 두 번째 보드를 싣고 호텔로 돌아갔다. 그 모습을 보며 서울 부모님께 전화해 이바지 음식 준비를 당장 멈추라고 소리쳤다. 대단한 부부 싸움이 있었고, 서핑보드만 보면 불타오르던 신혼여행의 위기가 떠오른다.

— 박선영, 결혼 5년 차, 의류 브랜드‘위라라’대표


15-06-06

내 나이 54세, 생애 처음으로 오카리나를 배웠다. 갱년기로 힘들어하던 내게 오카리나 소리가 천상의 소리로 다가왔다. 어떤 날은 구슬프게, 어떤 날은 행복하게… 부는 방법은 같아도 매번 느끼는 감정은 달랐다. 오카리나를 배우기 시작한 뒤로 부부 싸움이 줄었다. 뒤늦게 취미 생활을 시작한 나에게 남편은 악보대를 선물했다. ‘인생은 미완성’이라는 노래를 연주할 때 가장 행복하다. 가끔은 반주에 맞춰 같이 노래도 부른다. 곧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가 된 우리, 작은 오카리나 하나가 우리에게 값진 선물이 되었다.

— 변화란, 결혼 35년 차, 주부


15-06-07

아이를 낳고 한 달쯤 되었나, 지금 생각하면 아마도 우울증이었던 것 같다. 쇼핑몰 장바구니에 테디베어 인형을 잔뜩 담았다.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난생처음 인형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집으로 인형이 배달 왔다. 남편이 장바구니에 있는 물건을 몰래 주문한 것이다. 테디베어 인형은 생애 처음으로 이성에게 받은 인형 선물이다. 아이는 더 자랐고 지금 그 인형은 아이가 꼭 껴안고 자는 애착 인형이 되었다. 왠지 모르게 이 인형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위로받는다는 느낌이 든다.

— 이구름, 결혼 5년 차, ‘슬로우파마씨’ 대표


15-06-08

그는 수요일마다 내게 꽃을 선물했다. 몽글몽글하던 연애를 통해 우린 결혼했다. 첫아이가 네 살이 된 어느 날, 퇴근길 남편의 손에 카디건이 들려 있었다. 기념일도 아닌데 옷을 선물 받았다. 쇼윈도에 걸려 있는 카디건이 내게 잘 어울릴 것 같아 사 왔다고 했다. 세월이 흘러 내 취향이 변한 걸까,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그 순간만큼은 남자 친구이던 그의 다정한 모습을 생각해 싫은 내색은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카디건은 처음 선물 받은 그 모습 그대로 5년째 옷장 속에 잠들어 있다.

— 유혜영, 결혼 9년 차,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썸앤’ 대표


15-06-09

여느 부부와 다름없이 아이를 중심으로 삶이 흘러가고 있었다. 기념일에는 아이를 동반한 호캉스나 가족 여행이 자연스러워졌고, 사실 서로를 향한 애틋함은 잊은 지 오래다. 오롯이 서로를 위해 무엇인가 생각하는 시간을 갖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그런 우리 부부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건강 문제였다. 지난해 치료를 위해 휴직을 했는데, 그때 남편은 덜컥 겁이 났단다. 지금은 다시 건강을 회복하고 복직을 준비 중이다. 그러니까 청혼 후 7년 만에 온전히 나를 위한 선물을 받았다.

— 박선영, 결혼 7년 차,에디터


15-06-10

그가 시집 한 권을 건넸다. 읽어보고 싶다고 흘린 말을 기억하고 사 온 건가 싶었는데, 책장을 넘겨보니 편지가 들어 있었다. 평소 그의 문장력과 달리 다소 어려운 내용이었다. 의아해하며 시집을 훑어봤는데 책 속의 밑줄 친 문장들이 편지 속 문장과 같았다. 내용은 결혼해서 잘 살아보자는 것인데, 중요한 건 이 편지와 시집을 건네는 그 순간이 바로 프러포즈였다는 것이다. 눈치 없는 나는 눈물의 감동 타이밍을 완전히 놓치고 말았다. 어색하게 제 주위를 빙빙 도는 그와 웃기 바빴다. 이 프러포즈를 곱씹을 때마다 참 영특하고 낭만적인 사람과 살고 있구나 싶다.

— 문주희, 결혼 3년 차, 편지 가게 ‘글월’ 운영


15-06-11

일러스트레이터인 아내는 항상 내 모습을 그림으로 남겨주곤 했다. 딱히 쓸데가 있어서는 아니다. 연애 시절 연습장과 펜을 들고 다니며 서로가 서로를 그려주는 카페 데이트가 참 즐거웠다. 한 사람이 늦으면 다른 한 사람은 상대의 모습을 생각하며 스케치를 하곤 했다. 이 그림은 만난 지 1주년을 기념한 커플 머그잔을 만들기 위해 아내가 그려준 것이다. 결혼하고 한집에 살다 보니 카페에서 데이트를 하지 못한다. 이 그림을 보면 그 시절의 우리가 떠오르곤 한다.

— 주재범, 결혼 2년 차, 픽셀 아티스트


15-06-12

남편은 남다른 패션 감각의 소유자다. 본인뿐 아니라 내게도 어울리는 옷과 액세서리를 제안해주는 일에 즐거움을 느낀다. 우리의 결혼반지도 그가 직접 만들어주었다. 반지에는 그와 나의 탄생일을 새겼고, 울퉁불퉁하고 투박하게 망치질을 해 빈티지한 멋을 내기도 했다. 반지 안쪽에는 우리가 함께 깊이 공감한 문구, ‘우리에 대해 아무도 모른다’라는 의미로 ‘Nobody can tell’이란 문장을 새겼다. 함께 공감하고 감동하는 것이 앞으로 더 많아졌으면….

— 김지겸, 결혼 3년 차, ‘미소플레테’ 운영

  • 2020.01.06
  • Editor 김경민
  • Photo 이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