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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yes — Issue 4. 기록

내 모든 기록의 쓸모

The Purpose of Every Record

  • 2017.04.21
  • Illust 정성
  • Words 김민철

실망시켜서 미안하지만, 나에겐 낡은 노트도 매일의 일기장도 없다. 다만 내 방식대로 매일을 기록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도대체 어떤 기록이냐고?

어쩌다 보니 책을 내게 되었고, 어쩌다 보니 나를 ‘작가’라고 부르는 사람도 생겼다. 또 어쩌다 보니 책 제목이 《모든 요일의 기록》이다. 이 제목 덕분에 사람들은 내게 묻는다. 열에 아홉이 같은 질문이다. “기록을 정말 많이 하시나 봐요?” “아... 아니요, 꼭 그런 건....” 우물쭈물한 내 답에 사람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시 질문한다. “그런데 왜 제목이...?”



기록하는 사람들
‘기록’이라는 단어 앞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떠올리는 장면은 늘 낡은 노트와 펜을 들고 다니는 사람이다.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가도 문득, 혼자 커피를 마시다가도 문득 지나가는 영감들을 낚아채서 낡은 노트에 무심하게 써 내려가는 모습. 분명 어느 영화에서 본 것 같은 장면이다. 어떤 멋있는 소설가가 그랬던 것 같고, 어떤 대단한 아티스트가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고뇌에 찬 표정으로 주변을 응시하는 모습, 찰나도 놓치지 않는 철저한 모습. 사람들은 ‘기록’이라는 단어 앞에서 엇비슷한 이미지를 기대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기대하는 또 하나의 장면이있다. 어두운 밤, 스탠드 불 하나만 켜놓고 침대에 엎드려 일기를 쓰는 모습이다. 가족 누구도 모르는 장소에 비밀스럽게 웅크리고 있다가 밤이 되면 등장하는 일기장. 그 일기장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어긋난 진심부터 오늘의 좌절과 내일의 기대까지. ‘기록’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책까지 쓴 사람이라면 그런 일기장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야 할 것 같다는 게 사람들의 기대인 것이다. 실망시켜서 미안하지만, 나에겐 낡은 노트도 매일의 일기장도 없다. 다만 내 방식대로 매일을 기록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도대체 어떤 기록이냐고?


식탁에 마주 앉아 매일을 기록하다
매일 저녁이 되면 나와 남편은 마주 앉는다. 동네 식당의 식탁일 때도 있고, 동네 술집의 식탁일 때도, 우리 집 식탁일 때도 있다. 어쨌거나 별일 없다면 거의 매일 마주 앉는다. 그리고?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대화를 한다. 뭔가 그럴싸한 일을 기대한 분에겐 미안하지만 정말 그게 전부다.


그 테이블 위에서 나의 지리한 하루는 오래 씹고 싶은 안주가 된다. 나만의 소소한 뿌듯함이 있다면 그 역시도 오늘의 식탁에 올라간다. 야근을 하고 늦게 들어오면 그 고충 또한 식탁에 올라간다. 늦어진 결정, 나만의 반성, 우연히 본 좋은 구절, 오늘 발견한 재미있는 영상, 그러니까 그 무엇이라도 훌륭한 반찬이 된다. 그러다 보니 술을 마시고 늦게 들어올 때에도 마지막 한잔은 아껴둔다. 집에 들어와 식탁 앞에 앉아 남편과 마지막 한 잔을 기울이기 위해. 남편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다 보니 늦게 집에 들어오며 하는 말은 정해져 있다. “얼른 들어갈게. 나랑 한 잔은 마셔줘야 해!”


그렇다. 농담처럼 들리겠지만 이것이 정말로 내가 매일을 기록하는 방식이다. 담임선생님이 매일 검사하는 것도 아닌데 매일 일기를 쓰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우니까. 낡은 노트를 챙겨 다니는 건 생각보다 짐스러우니까. 심지어 휴대폰 메모장이 그 기능을 훌륭하게 수행해주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안 들고 다니게 되었다. 하지만 식탁 앞에 마주 앉는 일은 어렵지도 짐스럽지도 않다. 오히려 하루 중 가장 즐거운 시간이라 기꺼이 기다려 기꺼이 하게 되었다.


그렇게 서로 쌓아가는 시간의 힘이란 실로 대단한 것이다. 모두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의 대화는 뚝뚝 끊기지만, 어제도 만나고 오늘도 만나는 친구와의 잡담은 좀처럼 바닥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을. 서로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대화는 단숨에 핵심으로 직진한다. 서로의 일상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사소하게 넘길 수 있는 일은 없다. 아무리 사소한 일일지라도 우리의 술자리에선 중요해진다.


조금만 이야기해도 풍부하게 알아듣는 상대와 매일 앉아 있다는 건, 사소한 일상을 깊이 음미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진다는 건 나의 매일을 한층 풍부하게 기록하는 데 더없이 좋은 방법이다. 적어도 내겐 그렇다. 그래서 오늘도 술을 마신다. 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소통하기 위해! 일상의 윤활유를 마시는 것이다.

05-01


나만의 기록법을 찾아내다
물론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저녁 식탁 앞에 앉을 수는 없다. 대한민국은 직장인을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야근은 수시로 끼어들고, 회식도 잊을 만하면 잡히고, 이래저래 공사다망하다. 내가 덜 바쁜 어느 날에는 남편이 바쁘다. 바빠서 코빼기도 못 보는 날이 쌓여간다. 다시 말하자니 귀찮고, 처음부터 설명하자니 시간이 없어서 꺼내지도 못하는 말도 쌓여간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일상에 매몰되는 것이다.


최근 <아빠의 전쟁>이라는 다큐멘터리가 화제가 되었다. 가족이지만 가족이라 부르기 애매한 존재, 아빠에 관한 다큐멘터리였다. 카메라가 비추는 아빠는 우리가 아는 바로 그 아빠들이었다. 늘 바쁘고, 늘 피곤하고, 집안일에는 무능한 아빠. 한가한 어느 날 자식들에게 조금 친한 척을 해보려 해도 돌아오는 답은 뻔하다. “아빠는 모르면 좀 가만히 있으세요.” “왜 갑자기 저한테 그러세요?” 가족에게 말을 걸어봐도 침묵만 돌아오는 경우가 더 많다. 그래서 다시 아빠는 침묵을 택한다. 식탁 위에는 밥 먹는 소리만 들리고, 거실에서는 모두 텔레비전을 향해 앉아 있다. 그런 그들에게 미션이 주어진다. 매일 저녁을 가족과 한 식탁에서 밥 먹기.아빠와 함께 있다는 사실 자체를 어색해하는 아이들에게 ‘아빠’라는 존재를 ‘기록’하는 것이 미션인 것이다.


그렇다. 그렇게 하루하루 조금조금 기록하는 것이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같이 먹는 밥 한 끼로, 같이 걸은 산책길 하나로, 같이 본 영화 하나로, 같이 하는 게임 하나로 기록하는 것이다. 나의 존재를 상대에게, 함께 보내는 시간을 우리 몸에.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일을 기억할 리가 만무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어제 일도 기억나지 않는데 한 달 전에 가족과 나눈 평범한 대화가 또렷하게 기억날 리 없으니. 물론 시간이 지날수록 디테일은 뭉개질 것이다. 그때 분명 마주 보며 웃었던 것 같은데 이유는 기억나지 않을 것이고, 그때 분명 뭔가로 언쟁을 한 것 같은데 원인이 무엇이었는지가 가물거릴 것이다. 하지만 누가 그 기록을 의미 없다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우리 사이에 형성된 자기장을 누가 마다할 수 있을까?


기록은 좀처럼 우리를 배신하지 않는다. 인스타그램에 매일 올리는 근사한 순간의 기록도 좋고, 트위터에 매일 올리는 잡담의 기록도 좋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기록하고 싶은 것은 나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의 기록이다. 그 기록을 위해 나는 술을 택했지만, 당신에겐 당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기록법이 있을 것이다. 그 기록법을 찾을 수 있길, 그리하여 당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방식으로 당신의 매일을 기록할 수 있길! 건투를 빈다.


05-02

김민철

남자 이름이지만 엄연히 여자. 카피 한 줄 못 외우지만 엄연히 카피라이터. 그 흔한 공모전 한번 안 해보고 광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이유로, 잡다한 것들에 대해서는 ‘어렴풋하게’ 안다는 이유로 2005년, 광고 대행사 TBWA KOREA의 카피라이터가 됐다. 광고를 너무 몰라 회의 시간 치밀한 필기를 시작했고, 그 회의록을 바탕으로 《우리 회의나 할까?》라는 책을 냈다. 기억력이 너무 나빠 평소에 다양한 기록을 시작했고, 그 기록을 바탕으로 《모든 요일의 기록》 《모든 요일의 여행》을 출간했다.

  • 2017.04.21
  • Illust 정성
  • Words 김민철